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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Jun 24. 2019

우리는 오늘도 죽어가고 있다.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고


종소리가 울린다. 눈부시게 빛나는 문 사이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온다. 한껏 차려입은 그들의 옷차림을 보니 어디 좋은 곳이라도 가는 걸까. 저마다 입장하는 사람들은 입구에서 이름을 확인받고 안으로 나선다.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이 곳은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는 중간역 림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림보에서 일주일간 머물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추억을 단 하나 고르게 된다. 추억을 고르게 되면 림보 직원들은 그것을 영상으로 재현하고, 사람들은 그 영상을 보며 추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다른 기억은 잊히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만을 가슴에 안고 편히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단 하나의 추억만 골라달라는 직원의 요청에 더 살아봐야 즐거울 게 없다고 말하는 아저씨, 아무런 대답 없이 온화한 미소만 짓는 할머니, 어떤 선택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청년까지. 같은 날 이 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


그렇군요. 30명이나 디즈니랜드를 골랐군요.


어린 여학생은 가장 소중했던 추억으로 디즈니랜드를 골랐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간 그곳에서 맛있는 핫케이크를 사 먹고, 스플래시 마운틴 탔던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 보였다. 림보 직원으로 1년째 일하고 있는 시오리(오다 에리카)는 그녀를 따로 불러 "디즈니랜드를 골랐던 사람은 네가 30번째야"라는 말을 건넨다.


"그렇군요. 30명이나 디즈니랜드를 골랐군요.."


30번째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다음 날 디즈니랜드를 선택한 게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며 다른 추억을 꺼냈다.


"세 살 쯤이었던 것 같아요. 여름이었고, 마당에 하얀 빨래가 흔들리고 있었어요. 전 엄마 무릎에 누워 귀 청소를 받고 있었죠. 그때 엄마의 냄새와 뺨이 엄마 허벅지에 닿았던 느낌을 기억해요. 부드럽고 따뜻했어요. 아주 그리운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비슷한 또래라면 누구나 즐거웠던 디즈니랜드 대신 어린 시절 느꼈던 엄마의 촉감과 냄새를 가장 소중했던 추억으로 골랐다.


있지도 않은 잔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허공만 가른다.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두 팔을 허우적거린다. 열쇠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열쇠가 없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애도

 

지난날과 다를 바 없이 잠에서 깼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나를 휘감는다. 두렵다. 그 감정은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로 시작하는 소설 『쇼코의 미소』의 첫 문장과 비슷했다. 어느 날. 친구를 통해 전해 들은 다른 친구의 죽음은 나를 초연하게 만들었다. 얼굴만 아는 정도였고, 친했던 건 아니었기에 무덤덤할 줄 알았는데 일상에서 한 번씩 되살아난 기억이 나를 찾아온다.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의 마지막 얼굴은 늘 웃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해맑은 모습을 마지막이라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잠에서 깨 문득 느낀 두려움과 다른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듣고 난 후의 느낌은 이상하리만큼 비슷했다.)


길을 걷다 저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경찰차인지 구급차인지 아직 구분되지 않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가 저절로 향한다. 소리가 점점 커지고 사이렌 소리를 내던 차량이 구급차임을 확인하고 내 시야에 사라지기 전까지 나도 모르게 환자를 이송 중인 구급차량을 응시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도로가 막히면 인도에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조급하다. 하물며 그 차량 안에 있는 위독한 환자와 그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 중인 구급대원의 마음은 얼마나 급할까.


좋은 죽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가 식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한 사람씩 호명하며 "사랑한다"라고 속삭이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죽음은 흔치 않다. 만성 질환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도 발작이나 출혈 등으로 한 순간에 숨이 넘어간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도 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좋은 죽음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인 조언을 담은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통증에 꼭 독한 약이 필요하지 않듯이, 죽음에 꼭 큰 슬픔이 필요한 건 아니다. 좋은 죽음은 얼마든지 많다. 다만 우리는 '죽음' 자체를 터부시 하며 살아왔기에 막상 닥쳤을 때 그동안 회피하던 감정까지 한 번에 밀려오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평생을 미루고 미루다 끝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자각하게 된다.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사람 앞에서 "넌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어"라고 말하는 우를 범하지 마라. 아울러 "내가 이 시련을 이겨내도록 제발 도와줘"라고 절대로 요구하지 마라. 곁에서 지켜보는 게 견디기 힘들다고 절대로, 절대로 불평하지 마라. 죽어가는 사람은 당신을 위해 그런 일을 해줄 의무가 없다. 당신의 한탄을 들어줄 의무도 없다. 자신의 과거 행동을 설명하거나 자신의 죽음 때문에 속상한 당신의 마음을 달래 줄 의무도 없다.
 ―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의사소통


귀중한 사람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또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는 오늘도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이 많다.




Photo by Adrien Olich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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