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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Jun 30. 2019

일단 한 번 해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신입사원 서모씨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오늘도 회사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업무에 투입되기 전에 상사가 공부하라며 던져준 책을 읽고 있긴 하지만, 읽는 내내 졸음이 쏟아져 공부하는 척 졸기 바빴다. 옆에 앉은 대리님 표정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졸고 있는 모습을 들킨 것 같다. 대리님이 자리에 일어설 때마다 몸이 움찔한다. 면접 때만 해도 대표님 앞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짐까지 했는데 최근 며칠 사이 한 거라곤 OJT를 받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멍 때리기 바빴다. 스트레칭하다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동기랑 눈이 마주친다. 서로 피식 웃는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담배 피우는 동기를 따라 잠시 밖으로 나왔다. 한숨을 크게 내뱉으니 사무실에서 경직된 몸이 스르륵 풀린다. 그래도 불안은 여전하다. 내가 이 조직에 필요 없는 건 아닌지, 회사에서 일단 뽑아놓고 미안하다며 자르는 건 아닐까. 그러면 취업 준비를 다시 해야 하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계속되는 '심심함'을 견디지 못한다. 며칠 뒤 드디어 업무에 배정받았지만 아는 게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팀장님은 직속 사수에게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지만, 자기 일도 쳐내기 바쁜 사수에게 물어볼 때마다 실력이 없어서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오늘은 저녁을 먹고 회사에 남아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내 몫 1인분을 해내려면 지금보다 실력을 키워야 한다. 밥을 먹고 자리에 앉았는데 야근 중인 과장님이 부른다.


"서 사원, 이 프로젝트 좀 해볼래?"

"네! 잘 모르지만 일단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은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 준다.  

 ― 책 『피로사회』, 24p



예~ 할 수 있어요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진짜사나이 특집에서 박명수는 점호 시간에 경례구호인 'I Can Do' 대신 'Yes I Can'이라고 잘못 말해 생활관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병영은 대표적인 규율사회의 모습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주장했던 규율사회는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성이 화두였다. 규율사회의 대표적인 장소라 할 수 있는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넘친다. 오늘날의 사회는 박명수가 말했던 것처럼 뭐든지 할 수 있음이 기본 전제가 되는 긍정성의 '성과사회'다. 그곳이 병영일지라도 말이다. '복종적 주체'가 근간이 되는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는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로 이루어진 사회로 탈바꿈했다. '신이 죽으면 그 자리에는 건강의 여신이 들어설 것'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그의 말처럼 건강은 이제 트렌드가 되었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지식 근로자 개개인은 CEO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¹ 복종적 주체였던 육체 근로자에서 성과 주체가 된 지식 근로자는 이제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20세기 초에는 어느 국가에서든 육체 노동자가 전체 노동 인구의 90퍼센트 내지 95퍼센트를 차지했다. 농부들, 가정의 하인들, 공장의 노동자들, 광부들 그리고 건설 현장의 인부들이 노동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것이다. (중략) 오늘날 모든 선진국에서 최대 단일 노동력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은 육체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 근로자들이다. 20세기 초에는 어느 국가에서든, 심지어 최고의 선진국에서조차 지식 근로자의 수가 아주 적었다. 전체 노동 인구 가운데 지식 근로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퍼센트 내지 3퍼센트를 넘는 나라가 한 곳이라도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의 예를 보더라도 전체 노동 인구 가운데 지식 근로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대략 40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²


성과주의 사회에서 지식 근로자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타자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경영자가 되면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했다. 덕분에 우리는 퇴근 후 각자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스터디에 참여하고, 개인 프로젝트를 만들어 지금 사회에서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커리어를 갈고닦는다. 하지만 자유에 책임이 따르는 법. 자유는 새로운 강제가 발생하면서 자기 착취를 동반한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출퇴근 시간에도 자기 자신을 착취하기 바쁘다.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규율 사회에서는 주어진 할당량만 채우면 됐지만, 성과 사회에서는 성과 압박에 따라 끊임없이 목표를 재설정하기 때문에 할당량이라고 할 게 없다. 그 결과 우리는 현재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기 싫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기 바쁘다. 내일은 오늘보다 한 뼘 더 성장할 거라는 기대로 인해 어떤 행동에서도 만족감을 맛볼 없다. 동시에 무언가를 완결시킬 있는 능력도 상실되며, 어떤 목표를 이룩했다는 느낌은 회피된다.  


는 사람이 나에게 "글을 잘 쓰네"라고 칭찬해도, 여전히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성과를 내려면 끊임없이 자기 부인이 행해져야만 한다. 스스로에게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과 확연히 구별된다. 


"나 번아웃(burnout) 왔나 봐.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낙오하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번아웃 증후군이 왔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성과사회의 긍정성 과잉은 우울증과 번아웃 증후군을 양산했다. 지난 5월 28일 세계 보건기구(WHO)는 '번아웃 증후군'을 직업 관련 증상의 하나로 분류했다. 의학적 질병은 아니지만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으로 판단한 것이다. ³ 이제 사회에서도 뭐든지 할 수 있는 긍정성이 좋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인식하고 있다. 


한병철 교수가 쓴 책 『피로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전환되는 현시점에서 긍정성의 과잉으로 얼룩진 성과주의가 낳은 현대인의 병의 진단을 예리하게 짚어냈지만,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타자로 인한 착취는 폭력적 저항을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우울증과 번아웃 증후군의 배후에는 '나 자신'이 가해자로 지목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느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무턱대고 시작하기보다 좋은 것도 과잉이 될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단순한 분주함은 집중의 감각을 흩트려 놓는다. 성과사회의 긍정성은 무한하지만, 개개인의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책 『필경사 바틀비 : 월스트리트 이야기』에서 바틀비가 시종일관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했던 '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서 사원, 이 프로젝트 좀 해볼래?"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1. 피터 드러커,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323p

2. 피터 드러커,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12~13p

3. 중앙일보, 뉴스 기사 -  푹 쉬어도 피곤···WHO 인정한 '번아웃 증후군' 증상 보니


#씽큐베이션 #대교 #피로사회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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