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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Jul 04. 2019

쓸데없음이 새로움을 낳는다

책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를 덜 읽고 문득 든 생각.


요즘 읽어야 할 양이 산더미다. 가끔은 숨이 턱! 하고 차오를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읽어온 관성 덕분인지 또 되긴 된다. 그 와중에도 당장 읽어야 할 책들 사이에 읽고 싶은 책 하나를 끼워 넣었다. 회사까지 출근 시간만 1시간이 훌쩍 넘다 보니 그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독서를 이어간다. 지하철에서 서있을 때는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고, 자리가 생기면 가방에서 종이책을 꺼낸다. 잠시 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진도는 조금씩 나간다. (예전에는 출퇴근 시간에 책을 읽어봐야 얼마나 되겠어?라는 의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해 딴짓을 했다면, 지금은 그 의문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의외로 이때 읽는 독서량이 제법 된다.)


책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느리게 읽고 싶지만 그건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한 권을 천천히 탐독하기보다 빠르게 읽고, 필요할 때마다 다시 읽는 게 내게 최적화된 독서법이다. 속도를 늦추면 오히려 체하는 느낌이다.   


어머니에게 나의 첫 시집을 드렸을 때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애썼구나. 그런데 쓸데없는 일에 너무 시간을 뺏기지 마라"
나는 그때 속으로 말했다.
'어머니. 시에 대해 정확히 보셨군요. 그런데 저는 사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뺏기고 싶습니다.'

― 책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오늘은 출근길에 종이책을 읽을 기회가 금방 생겼다. 가방에서 책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를 꺼내 읽다 쓸데없음을 이야기하는 구절에 시선이 멈춘다. 이 문장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지금 내 마음이 분주하다는 것을.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책『피로사회』


우리가 '해치워야 일'은 쓸데없이 분주함을 만들고, 스스로 시작하는 '쓸데없는 일'은 새로운 것을 낳는다. 한병철 교수는 책  『피로사회』 를 통해 성과사회에서 '긍정성 과잉'은 소진이나 탈진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진단한다. 긍정성 과잉은 다시 말해서 해야 할 일의 과잉이기도 하다. 쓸데없는 일은 대부분 하고 싶은 것으로 귀결된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쓸데없는 일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쓸데없는 일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의도를 슬며시 드러낸다.


'책은 왜 읽는 거야? 이직하려고?'

'나는 읽어도 달라지는 게 없던데'

'소설 아니면 그게 책인가'

'자기 계발서는 다 똑같은 말만 해'

'책 읽을 시간이 있나?'


그 의도에 상대방이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면 한 마디 보탠다.


'너한테 그런 건 아니고'

'내가 그렇다는 거야'

'나는 아직 많이 안 읽어봐서'

'나랑 그냥 잘 안 맞아서'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의도하지 않음은 마음속에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감이 애초부터 결여되었다는 사실. 타인의 인격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들로 당연시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실은 "당신의 인격이 그토록 중요한지 몰랐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큰 모욕감을 불러일으킨다.

― 책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많은 책을 빠르게 해치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권의 책을 천천히 탐독하는 사람이 있다. 여행도 그러하지 않은가. 한 나라에서 비자가 만료될 때까지 몇 달간 푹 빠져 지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숙소로 향하는 길이 익숙해질 때쯤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는 사람도 있다. 많이 읽든, 적게 읽든, 천천히 읽든, 빠르게 읽든 각자 취향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다. N명의 사람에게 N개의 취향이 있듯이, 독서할 때 각자 선호하는 분야도 존중받아야 한다. 필요하지 않은 분야는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것도 하나의 취향이다. 다만 책을 읽지 못하는 것과는 구별 지어야 한다. 사자가 눈 앞에서 풀 뜯어먹는 토끼를 사냥하지 않는 것은 '안 하는 것'이지만, 사슴은 '못하는 것'이다. 사슴이 안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내가 꾸준히 필사를 하는 까닭은 눈으로 느리게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으로라도 느리게 읽으려면 필사를 해야 한다. (참고 : 가장 느리게 읽는 독서, 필사)


현재 자신의 독서법이 불만족스러운 사람은 타인의 독서 취향을 잠시 모방할 수 있어도 그 사람처럼 읽을 수는 없다. 내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 한계를 뛰어넘은 방법이 엄청 좋은가 싶다가도 금방 사그라드는 이유는 그건 다른 사람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게 맞는 방법이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으면 한계에 다시 맞닥뜨릴 때 어찌할 바 모르고 지금과는 다른 독서법에 서성인다. 한계는 또 다른 이름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나는 아직 많이 어둡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심보선 시인을 놓고 "그를 질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냥 그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 타인의 쓸데없음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종종 의도를 드러내곤 한다. 그 의도에는 시기와 질투도 포함되어 있다. 버리는 날이 와야만 비로소 내게 적합한 속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우선 시간을 빼앗는 쓸데없는 일부터 찾아 나서야겠다.



Photo by Jeremy Lapa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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