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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Oct 07. 2019

미리 하면 기회가 한 번 더 찾아온다.

누군가 마무리짓고 있을 때,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이때의 스릴감이란.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에 가고 있다. 5분 뒤에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야만 약속 장소에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다. '조금 아슬아슬한데 뛰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처럼 걸어도 탈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오늘도 세잎이다. 내가 타는 지하철 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 평소보다 오래 정차한 덕분에 가까스로 탔다. 이때의 스릴감이란. 이 맛에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어떤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감 기한이 오늘 밤 12시일 때 11시 59분쯤 제출 버튼을 누른다. 무사히 제출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때의 기분은 짜릿하다 못해 찌릿하다. 


그런데 문제는 아슬아슬하게라도 시간에 도착하거나 마감기한 전에 제출해야만 스릴감을 온전히 느낄 있다는 것이다. 1분이라도 늦는다면 스릴감은커녕 온갖 핑계가 떠오른다. 


'지갑을 깜빡해서 집에 돌아가지만 않았더라도'

'지하철이 앞차와 간격으로 인해 서행하지만 않았더라도'

'화장실만 갔다 오지 않았더라도'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더라도'


몇 달 전 애덤 그랜트가 쓴 책 <오리지널스>를 보다가 창의적인 사람들은 미루기의 달인이라는 내용을 읽었다. 일부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꼭 모든 사람들이 미루기를 통해서만 창의성을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미루기도 미루기 나름의 원칙이 있다. 미뤄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마감기한을 앞두고 막판에 감당할 수준일 때만 가능하다. 물론 감당할 수준이더라도 이때만큼은 본인을 갈아 넣어야 한다.


창의성도 제 시간 안에 결과물이 나왔을 때나 논할 수 있다. 막판에 정성 들이느라 집중한 나머지 조금 늦었다는 핑계는 프로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미리 했더라면 하지 않아도 될 말이다. 마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출해야 할 경우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지금보다 완벽했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1단계 : 0에서 80까지 끌어올리는 단계

2단계 : 80에서 90까지 끌어올리는 단계

3단계 : 90에서 100까지 끌어올리는 단계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 때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0(無)에서 80까지 끌어올리는 단계다. 시간을 들이는 만큼 노력의 결과가 눈에 나타난다. 이때는 시간이 곧 결과물이다. 대부분의 결과물들은 1단계(80) 정도만 돼도 봐줄 만하다. 그러나 그건 보는 사람 입장에 서지.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80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2단계는 시간을 들여도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만드는 사람 눈에만 모자란 부분이 보인다. 2단계부터는 자기만족의 단계다. 3단계는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단계다. '파워포인트 작업'을 예로 들자면 내가 봤을 땐 도형이 모두 똑같아 보이는데 양쪽 점이 살짝 어긋났다거나 높이가 맞지 않는다는 둥. 같은 걸 보고 있는데 마치 다른 걸 보고 있는 느낌이다. 전체 맥락은 거의 잡혔는데 디테일을 집요하게 따지는 사람들이 3단계에서 1~2단계에서 쏟았던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쏟는다. 


미루기가 효과 있는 현재 작업의 진척 상황이 2~3단계 지점있을 때나 가능하다. 아직 1단계라면 창의성을 발휘하려고 미룬 것이 아니라 그냥 게을러서 미룬 거다. 대가들이 미루고 미뤄도 창의적인 작품을 탄생시킬 있는 1단계를 순식간에 건너뛸 수 있때문이다. 수십 년간 끊임없는 반복으로 숙달된 실력을 통해 바로 2~3단계로 진입한다. 미루기는 이런 사람들에게만 확실한 효과를 발휘한다. 


미리 하면 기회가 한 번 더 찾아온다.


가까스로 도착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스릴감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회사에 출근하거나 주말(또는 퇴근 후)에 모임을 갈 때 바로 시작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15분. 여유 있을 땐 30분 정도 미리 도착해서 내 책상 또는 카페에서 커피를 옆에 두고 일정이나 할 일이 적혀있는 바인더를 펼쳐두고 조금 이따 해야 할 일을 하나둘 살피면서 숨을 천천히 고른다. 잠깐의 쉼 없이 모임이나 업무가 바로 시작될 때면 한 번씩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험이 쌓이다 보니 꼭 미리 챙기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미리 와서 잠깐 시간을 갖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잠깐의 틈이 없었더라면 정신없어서 놓칠 때 드는 '좋지 못한 기분'이 야금야금 쌓인다. 그 순간에는 분명 작은 일이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어떤 무력감이 될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요즘은 카카오프로젝트100이 대세다. 많은 사람들이 100일 동안 습관 만들기도 다양한 목표에 도전하고 있다. 재밌는 건 프로젝트 내에서도 '미리파'와 '미루기파'가 나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슬람에서 1400년째 싸우고 있는 수니파, 시아파 같기도 하지만 미리파, 미루기파만큼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못 찾았다. 


프로젝트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하루가 끝나는 자정에 당일 인증이 마감된다. 이때 마감 10분 전인 11시 50분부터 다음 날 0시 10분까지 인증 내역을 살펴보면 무척 재밌는 광경이 펼쳐진다. 10분 전부터 마감시간까지는 오늘 내로 인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인증내역이 한 번에 올라온다. 그리고 날짜가 바뀌면 제 시간에 인증하지 못한 사람들의 탄성이 다음 날 오전까지 쏟아진다. 그런데 또 다른 재밌는 광경은 마치 날짜 바뀌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다음 날 과제를 미리 제출하는 사람들이다. 비슷한 시간대인데도 어떤 사람은 오늘을 가까스로 마무리짓고, 몇 분 후에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오늘'을 기다렸다가 느긋하게 마무리 짓는다.


오늘을 가까스로 마무리 짓는 사람이 깜빡하거나 갑자기 끼어든 급한 일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경우 인증을 놓치게 되는 반면 후자는 오늘 안에 기회가 아직 남았다. 평소보다는 늦었지만 아직 오늘 인증할 시간이 넉넉히 남았기 때문이다. 미리 하면 기회가 한 번 더 찾아온다.



       

Photo by Gia Ori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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