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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Nov 12. 2019

여행은 두 번 시작된다.

글은 내가 흔적 남겨놓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여행은 두 번 시작된다. 
처음 한 번은 여행지에서,
그다음 한 번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서



700페이지가 넘는 책 <생각에 관한 생각>을 올해 두 번이나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30년을 살면서 책을 곁에 두며 수도 없이 읽었지만, 이토록 두꺼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첫 번째 읽었을 때는 거의 삼키듯이 읽다 보니 읽으면서는 감탄할지 몰라도 책을 덮는 순간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일까. 두 번째는 꼭꼭 씹어먹었다. 물론 여전히 삼키던 버릇이 남아 중간에 목 뒤로 한 번씩 넘겼다.


그 책에서도 유독 내가 좋아하는 챕터를 하나 꼽자면 마지막 챕터 '두 자아'일 것이다. 우리 자아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로 나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을 겪는 자아가 경험하는 자아라면, 시간이 지나 지금 이 순간을 되돌아보는 자아가 기억하는 자아다. 신형철 평론가는 삶이란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고 했다. 질문을 던지는 자아는 기억하는 자아가 될 것이다.


기억하는 자아는 의미를 중시하기 때문에 여행지에 가서도 사진 찍기를 재촉한다. 그토록 기다렸던 여행이 정말 좋아야 한다면 우리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 아니, 찍을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보다 그 순간을 계속 곱씹어먹을 수 있는 기억을 중시하는 탓에 사진 찍기는 여행에 있어서 필연적이다.


여행지에서 찍은 흔들렸던 사진도 쉽게 지우지 못하는 까닭은 다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또 의미를 중시하는 기억하는 자아다. 지우려고 해도 자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사진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단서는 거의 없다. 단지 그 순간을 담았다는 이유로 의미에 걸려 또다시 살아남을 뿐이다. 기억하는 자아의 관점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담은 그 사진은 시간이 지난다고 그 소중함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점점 무심해질 것이다.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본가에 가는 횟수를 점점 줄이는 나처럼 말이다. (언제나 영원한 건 없다.)


여행이 두 번 시작되려면 글이어야 한다. 글은 경험하는 자아다. 우리는 경험하는 자아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먼 훗날 기억하는 자아가 다시 읽었을 때 경험하는 자아의 관점으로 여행을 또렷하게 만날 수 있다. 감정은 글에게 관대하다.


우리가 두 눈으로 풍경을 바라볼 때는 경험하는 자아라면,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 풍경을 찍는 건 의미를 중시하는 기억하는 자아다.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 사진을 보며 여행을 떠올리는 자아도 다시 기억하는 자아다. 기억하는 자아는 왜곡 투성이다. 그렇게 되면 여행은 두 번이 아니라 한 번도 제대로 시작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린 글을 써야 한다. 사진은 그 프레임 안에서만 여행을 떠날 수 있지만 글은 내가 흔적 남겨놓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때 여행은 비로소 두 번 시작된다.




덧붙이는 말

1. 이번 글은 이동진 영화 평론가의 신작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의 제목과 작가의 말을 살짝 참고했다.


참고 도서

책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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