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이 나를 볼 테니까.
신입사원이던 저는 장난 삼아 젓가락을 감싸고 있던 종이를 여러 번 접어 M자 형태로 만든 다음, 그 위에 젓가락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제 바로 앞에 앉아 있던 '그녀'는 어땠는지 아세요? 젓가락이 들었던 종이를 손으로 확 구기더니, 그 위에 무심하게 젓가락을 놓는 겁니다.
남 : 지금 뭐하신 거예요?
여 : 젓가락 놓은 건데요. 바닥에 닿지 말라고.
― 책 <평소의 발견>, 유병욱
신입 카피라이터였던 유병욱 작가는 책 <평소의 발견>에서 같은 회사 선배 디자이너와 점심을 먹은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무심하게 종이를 구겨 그 위에 젓가락을 놓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적어도 이 사람이라면 젓가락 놓는 것 하나만큼은 평생 동안 싸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는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탓에 주변 여건의 미세한 변화로 우리 판단이나 결정이 달라졌을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절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유병욱 작가 또한 그녀의 젓가락 놓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나머지, 그 이후 짬뽕 먹는 모습도 예뻐 보여서 '이런 사람은 전 세계에 한 명뿐일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 뒤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백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의 아내가 되었다. 누군가는 '고작 젓가락 하나 때문에?'라고 말하겠지만 지금 글을 쓰는 나도,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순간에, 기분에 끊임없이 흔들리고야 마는 비합리적인 인간이다.
회사에서 업무와 상사에게 시달리다 녹초가 된 채로 퇴근한 직장인들이 저녁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까닭은 어쩌면 '심리주의자의 기술'에만 매달리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최인철 교수가 쓴 책 <굿 라이프>에서는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을 크게 '심리주의자의 기술'과 '환경주의자의 기술' 두 그룹으로 나눴다. 심리주의자의 기술은 명상을 하거나, 감사일기를 쓰거나, 부정적인 사건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기술이고, '환경주의자의 기술'은 '심리주의자의 기술'처럼 특별한 마음의 기술을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애초부터 쉽게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술을 적절히 균형 있게 이용하는 것이 좋지만, 힘들 때 자신을 외롭게 두는 사람들은 유독 '심리주의자의 기술'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심리주의자의 기술의 효과는 철저히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에 기인한다. 그래서 지금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의지'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효과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래서 이 기술은 에너지가 충만하고 아직 의지가 꺾이지 않은 아침 시간을 활용하는 아침형 인간에게 적합하다. 반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등의 환경주의자의 기술은 에너지가 소진된 채로 퇴근하는 저녁형 인간에게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직장에서 녹초가 된 채로 퇴근하고 혼자 있으면 조금 나아지겠지 싶어 나를 그대로 방치할 때 정말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 날 잠을 많이 못 자서 몸이 피곤한 것과 에너지가 소진되어 마음이 피곤한 것의 휴식 방법은 다르다. 몸이 피곤하면 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등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마음이 피곤할 때는 되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수다를 떨거나 독서모임을 하는 등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피곤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이게 바로 환경주의자의 기술이다.
환경주의자의 기술이 좋은 건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 기술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사주는 것도 좋지만, 때론 기념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퇴근 후에 카페 자주 가지? 이거 마시고 하루 마무리 잘해!'라는 메시지를 담은 커피 기프티콘은 지친 상태로 퇴근하고 있는 타인에게 맛있는 기분을 선물할 수 있다.
내게 일어나는 우연을 내가 설계할 수는 없지만, 타인에게 일어나는 우연은 내가 설계할 수 있다.
― 책 <굿 라이프>, 최인철
내게 일어나는 우연을 내가 설계할 수는 없지만 타인에게 일어나는 우연을 끊임없이 설계한 사람이라면, 내게 일어나는 우연 또한 일어날 확률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엘로이즈(아델 하에넬)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에게 말했던 것처럼 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이 나를 볼 테니까.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中
참고 자료
책 <평소의 발견>, 유병욱
책 <굿 라이프>, 최인철
책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