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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Aug 06. 2020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걷는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땐 걷는다. 걷는다고 해서 바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걷는다. 숨이 조금 차오를 정도로 걷다 보면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은 적당히 흐르는 땀에 함께 씻겨나간다. 그때 비로소 다른 생각이 들어올 여유를 찾는다. 책상에 앉아있을 땐 머리로만 생각하지만 걷다 보면 모든 감각이 열린 덕분에 온몸으로 생각한다. 


매일 목표는 7,000보. 이걸 채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기분 하나는 좋다. 요즘처럼 비 오는 날이면 실내가 넓은 마트나 백화점을 트랙 삼아 걸음 수를 수집한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자연을 벗 삼아 걷는다. 평일 저녁에는 졸졸졸 물이 흐르는 탄천길을 따라 걷고 일요일 아침에는 집과 맞닿아있는 뒷산에 다녀오는 게 하나의 일상이 됐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슬링백을 메고 뒷산으로 향한다. 여행 갈 때 쓰려고 사둔 슬링백이 등산에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지 몰랐다. 이 시간이면 꽤 부지런히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제 막 산을 올라가면서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는 심정은 아침 일찍 여행을 떠날 때, 텅텅 비어있을 것만 같은 첫 차에 일터로 향하는 사람이 한가득일 때 느껴지는 경이로운 감정과 비슷했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부지런히 살아야지'


단 한 번의 쉼 없이 오르고 나면 해발 400m쯤 되는 정상에 도착한다. 슬링백에 챙겨 온 물을 꺼내 마시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나서 바로 내려온다.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약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 등산길에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처음에는 음악을 들었지만 등산할 때만 듣는 것을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다.


전에는 문학이나 브랜드 채널을 많이 들었다면 요즘에는 경제 팟캐스트를 많이 듣는다. 산이 힘들지 않을 땐 온갖 잡생각이 몰려오지만 숨이 조금만 차도 신경은 오로지 두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된다. 광고가 많이 나오는 팟캐스트를 만나면 짜증을 내면서 빨리 감기를 하는데 산길이 힘들어서 그런 건지 정말 광고 때문인지 모르겠다.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아무리 바빠도 매일 7,000보'라는 100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7,000보가 너무 싱거워 보였다. 그래서 10,000보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끝난 지금 7,000보는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출퇴근길만 해도 걸음 수가 쉽게 채워지는 평일과 산을 오르는 일요일에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무리가 없지만 문제는 별 볼 일 없는 보통날들이었다. 100일이라면 주말에도 이어갈 수 있는 일상이 돼야 한다. 우리는 한두 번 잘하면 그것을 근거 삼아 목표를 높게 세우는 실수를 저지르는데 만약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10,000보를 목표로 삼았다면 나는 모든 보통날들이 지옥이었을 거다.


어차피 매일 하는 거라면 가벼울수록 좋다. 가벼우니까 계속할 수 있다. 


여전히 산을 오르면서 숨이 찰 때면 오늘은 그만 내려갈까?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탄천을 걷다가도 갑자기 미뤄둔 할 일이 생각나 그 일을 해야 된다고 마음이 압박한다. 방해하는 마음은 언제나 가득해서 그것을 이겨내는 게 때론 과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다 오르고 나면, 다 걷고 나면 지금 이 순간이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을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쉽지 않아서 좋았다는 걸. 힘들어도, 쉽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조금씩 오르고 오르다 보면 산등성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모든 것을 용서할 멋진 풍경도 펼쳐질 것이고, 지나온 길들을 돌아보면서 뿌듯해할 것이고, 그러다 길게 잘 뻗은 내리막이라도 만난다면 다시 모든 걸 잊고 달려볼 거란 걸. 힘들고 지겹고 그만하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나한테는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걸.

― 책 <아무튼, 산>, 장보영




Photo by Arek Adeoy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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