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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Feb 04. 2021

잃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월요일 아침. 무슨 생각이었는지 일어나자마자 잠결에 감을 먹겠다고 칼을 쓰다가 오른손 엄지를 다쳤습니다. ‘조금 지나면 피가 멈추고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에 병원 대신 회사로 출근했습니다. 소독제와 밴드를 이용해 상처 부위를 응급 처치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정형외과를 찾았습니다.


간호사는 상처 부위를 보자마자 의사 선생님이 와야 알겠지만 꿰매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다른 환자의 진료를 마치고 도착한 의사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상처 부위 주변을 깨끗이 소독한 후에 마취를 하고 다섯 바늘이나 꿰맸습니다.


2021년이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취는 올해 느낀 고통 중 가장 클 겁니다. 다행히 상처는 잘 아물고 있고 매일 병원에 출근하며 소독을 받고 있습니다.


엄지 손가락을 다치고 처음 든 생각은 ‘씻을 때 불편하겠다.’였지만 생활 속 불편함은 디테일했습니다.


셔츠를 입을 때 왼쪽 손목에 달린 단추를 잠그기 어려웠고, 글씨를 쓸 때도 엄지는 힘을 받쳐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믹스커피를 먹기 위해 봉지를 찢는데도 엄지가 필요했습니다. 왼손으로 뜯어보려고 하니 영 자세가 나오질 않습니다. 가위를 사용할 때도 엄지 손가락은 힘을 싣는 부위였습니다. 500ML짜리 생수병을 따는데도 엄지가 필요했습니다. 엄지는 모든 행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엄지를 다치고 나서야 엄지가 무슨 역할을 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상처가 아물고 실밥을 풀 때까지 저는 엄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겁니다. 그리고 상처가 나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잊혀지고 말 겁니다.


고통에 빠져 있을 땐 이 고통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이라도 사그라들면 금방 잊고 사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예전에 어떤 고민이 있었고, 무슨 걱정을 했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지요.


지금의 고통이 얼른 지나가길 원한다면 ‘고통’에 불과하겠지만, 이 고통이 나에게 어떤 시련을 안겨주고, 이 시련을 뛰어넘었을 때 나는 얼마큼 성장해있을지를 생각한다면 지금 느끼는 고통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이성복 시인은 산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를 통해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라고 말합니다.


불행(고통)은 그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게 하는 성질을 가집니다. 그러나 불행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아직 그 불행을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아직 내 몸에 바짝 붙어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누구나 다양한 원인으로 고통을 느끼지만, 내 몸에 바짝 붙어 있는 고통이 더 큰 법입니다.

지금 가진 고통으로 글을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야기가 가진 힘이기도 하지요.

이번 주는 고통이 고통만이 아님을 알려준 이성복 시인의 책 <불화하는 말들>을 추천드립니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세요.”
-이성복 시인



책 <불화하는 말들>,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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