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은 비껴가지 않는다
아들로 말미암은 멸망
자신의 어머니와 맺어지며 아버지의 피를 손에 묻힐 운명
라이오스 왕을 죽인 살해범을 찾아 파괴하라
<오이디푸스 왕>의 머리 아픈 가족사의 중심에는 “신탁”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자리하고 있다. 상기된 세 가지 신탁은 오이디푸스의 삶을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첫 번째 신탁을 들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자신의 아들을 죽여버리라고 명한다. 그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시종에게 이를 지시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살아남는다.
청년이 된 오이디푸스는 두 번째 신탁을 듣는다. 어머니를 범하며 아버지를 해한다는 끔찍한 신탁에 그는 자신을 키워준 부모를 염려하며 그들을 떠난다. 테베로 향하던 오이디푸스는 우연찮게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그는 까맣게 몰랐지만)와 시비가 붙고, 불행히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다. 첫 번째 신탁이 완전히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후 스핑크스를 처치한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으로 추앙받고 왕비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이번에도 그는 까맣게 몰랐다!)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두 번째 신탁이 완성된다.
마지막 신탁은 앞선 두 개의 신탁으로 말미암은 오이디푸스의 패륜에 대한 단죄이다. 풍비박산난 오이디푸스의 인생은 추방으로 마무리된다.
<오이디푸스 왕>의 교훈은 무엇일까? 신탁은 이상하리만치 잘 들어맞는다. 그는 결국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범한다. 끔찍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오이디푸스는 엄청난 수치심에 스스로를 테베에서 추방한다. 결국 이 작품에는 존속살해와 근친상관을 엄격히 금하고자 하는 고대인들의 메시지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 특정 행동이 아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임을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첫 번째 신탁이 없었다면 라이오스 왕은 아들을 버렸을까? 불길한 신탁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갓 태어난 왕자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이디푸스에게 두 번째 신탁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을 키워준 부모님을 떠났을까? 그가 신탁을 듣고 떠나지 않았다면 길에서 라이오스 왕과 시비가 붙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신탁을 듣고 떠났기에 라이오스 왕도 죽이고 스핑크스도 처치하여 왕이 된 오이디푸스. 그는 자신을 추앙하는 왕국에 본래 남아있던 왕비를 처로 맞이했을 뿐이다.
모든 신탁은 마치 오이디푸스가 ‘존속살인과 근친상간‘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 같다. 그것은 끝없이 실마리를 던져주며 그가 정해진 운명을 따르도록 한다. 운명에 묶인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좌지우지되고 만다.
그리스 비극은 ’ 무질서‘에서 시작해 ’ 질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질서’로 돌아가는 방법은 바로 수치이다. 주인공은 스스로의 눈을 찌를 만큼의 수치를 느끼고 운명에 순응한다. 이를 보는 관객 또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금기를 어기지 않을 것이고, 질서를 따를 것이다.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도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것을 거역하지 않는다. 신탁의 강제성은 물리적이지 않기에 눈치채기 힘들다.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것을 지킨다고 믿는다. 너무나 당연하게 엄청난 폭력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라이오스 왕이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아들을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오이디푸스적인 삶의 태도는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 그것을 좌지우지하는 신탁과도 같은 권력, 거시적인 사회의 메시지 이런 것들에 묵묵히 순응하는 것이다. 21세기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신탁은 무엇일까?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도래 이래로 우리는 자본주의, 물신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등 각종 ‘-주의’로 점철된 ‘성공 신화’ 들을 본다. 실체 없는 메시지들에 둘러싸인 우리는 사회가 올바르다고 재단하는 길을 따라야 ‘옳다’고 스스로 믿고 안심한다. 자신의 안녕을 바라며 신탁을 따르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신탁을 충실히 따랐던 오이디푸스의 결말은 결국 추방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보며 과연 우리는 어떤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운명을 따를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이제 그의 딸 안티고네가 답을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