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라보는 정반대의 시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의 원리를 설명하는 일종의 문법서이다. 그에 따르면 좋은 비극이란 자고로 “도덕적 통찰과 감정적 성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비극적인 상황이 야기하는 각종 연민과 두려움은 소위 ”카타르시스“라고 불리는 ”적절한 감정의 정화“를 통해 다시 본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간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따라서 대체로 자신의 운명을 따르며 그것에 순응한다. 그가 운명에 순응하는 순간, 갈등은 해결되고 질서는 다시 회복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은 도대체 누가 결정하는 걸까? 인간이 ”운명“ 타령을 해온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은 수많은 희곡, 시, 소설, 영화 등의 단골 소재이고,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 운명이라는 것을 꽤 자주 운운한다. 가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은 정말 ‘운명인가?’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운명이 쥐어준 불행에 그대로 순응하는 사람도, 그 운명에 고개를 들고 맞서 싸우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여기 기로에 놓인 두 인물, 오이디푸스와 그의 딸 안티고네가 있다. 연작 형식으로 쓰일 이 글에서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정반대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자, 어머니의 남편이며, 딸의 오빠이자 아버지이다.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후 미망인이 된 어머니를 취했으며 어머니의 배를 통해 또 다른 생명들을 잉태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은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후의 시점부터 시작한다.
테베에 도는 역병에 근심하는 왕, 오이디푸스는 나라를 구할 해결책을 찾는다. 눈앞에 닥친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온다. 신탁의 내용은 바로 “라이오스 왕을 죽인 살해범을 찾아 파괴하라”. 선대 왕 라이오스가 부정하게 살해당해 분노한 신들이 테베에 커다란 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아폴로의 신탁과 함께 극은 라이오스 살해범 수사로 방향이 틀어지고, 일련의 증언들을 통해 라이오스 왕 살해범은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 왕 그 자신임이 밝혀진다. 충격을 받은 그의 아내이자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그는 존속살인과 근친상간이라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무지한 채 저지른 과오이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며 스스로 눈을 찌르고 테베에서 추방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주된 내용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과오를 알게 되고 죄를 인정하는 순간,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가 추방됨에 따라 테베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순응하고, 질서는 회복된다.
오이디푸스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나의 머릿속엔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가 끔찍한 패륜을 저지를 수밖에 없던 이유는 뭘까? 사실 그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나? 그는 왜 이 ‘부당한’ 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 진짜로 폭력적인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놈의 지긋지긋한 운명이란 뭐란 말일까? 이 글은 바로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