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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이 Aug 10. 2024

그냥 힘 좀 덜 내도 되잖아요?

여름이니까요

   나는 무척 고리타분한 사람이지만 자극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가장 최근에 끝까지 본 드라마는 <마스크 걸>,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든다.

   

   연극에 끌린 이유도 그런 까닭인지 모르겠다. 연극은 어쨌거나 ‘볼거리’이기 때문에 시선을 사로잡고 관객을 몰입시키는 순간이 존재한다. 애정하는 작품을 나열해 보면 <글렌게리 글렌 로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살로메> , <폭파> 등이다. 열거한 작품에는 갖가지 범죄와 욕설, 폭력, 난잡함이 난무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좋아한다.


   어지러운 무대 위에서 나만의 해석을 찾아내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보석을 찾는 것 마냥 기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누군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을 묻는다면 두말없이 <죽은 남자의 휴대폰>과 같은 따뜻한 작품이라 대답하는 앞뒤가 다른 연구자이기도 하다.


   자극추구형 인간이라 그런지 나의 일상 또한 자극으로 가득하다. 이때의 자극이란 박사과정과 주 6일 공부방을 동시에 운영하면서 생기는 광기 어린 스케줄이다. 학생들의 시험기간이 겹치면 일상은 그야말로 고자극 긴장상태 그 자체가 된다. 마감기한은 쫓아오고, 나는 도망간다. 해야 하는 일을 제때 해내기 위해 일 년의 반 이상을 심장이 쿵쿵거리는 상태로 산다.


   우당탕탕 1학기가 지나고 지금은 2024년 여름, 일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여름방학은 일 년 중 가장 심신이 편안한 시기라 흐느적거리는 상태로 살고 있다. 무더위, 습도, 비, 뜬금없는 여름감기까지 핑계도 참 다채롭다.


   그러나 긴장상태에 익숙해져서 인 건지, 자기 계발에 중독된 자본주의적 인간이라서 인 건지 바쁜 일 없이 지나가는 일상에 꽤나 불편한 감정이 문득 들곤 한다. 피드 속 떠다니는 ‘갓생’ 전설에 제 발 저린 도둑마냥 죄책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겨우 3주도 맘 편히 못 쉬는 꼴이라니. 나도 내가 참 웃기고 안쓰럽다.


그냥 좀 덜 힘내도 되잖아요?

   

   8월엔 논문스터디가 예정되어 있었다. 방학에는 오전 출근을 하여 참석이 힘들 것 같아 교수님께 메일을 드렸다. 괜찮고, 논문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교수님의 말씀. 안도가 되면서도 마음 한편이 무겁다. 박사연습생은 이러이러한 불안함과 저러저러한 부담감을 안고 있다. ‘나만 잘하면 되는데’라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 산다.


   최근 남편에게 불안함과 부담감에 대해 말하며 남들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정체감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었다. 고민 들어주기 장인인 남편은 말한다.


‘너보고 못한다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걸?’


끊임없이 자기를 소진하는 자본주의적 태도가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기가 참 쉽지 않다. 석사 논문에서 신자유주의적 인간을 그렇게나 비판했음에도 말이다!


   남편의 뼈 있는 위로와 함께 마음을 고쳐먹어야 하는 건 나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할까? 결국 나를 살리는 것은 폭풍 후의 온전한 휴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덜 힘낼 수 있는 힘’이 ‘힘낼 힘’ 보다 더 중요한 순간도 있는 법이다.


   입추가 지나고 8월도 곧 중순이다. 이번 여름 아직 물놀이 한 번 못해본 것이 떠오른다. 푸른 계절을 조금 더 즐겨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남은 여름은 바다와 고양이, 책, 글쓰기, 맥주, 떡볶이 이런 것들과 함께 보내야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가장 좋아하는 것들과 보낼 때다. 여름은 아직도 푸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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