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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Oct 30. 2015

조금 번거로워서 다행인 토스트​

 인생에는 약간 번거롭지만 그래서 좋은 것들이 있다​

일러스트 @황인정


4시에 먹는 식빵은 토스터에 넣지 않는다.

팬에 버터를 녹이고 식빵의 겉면이 갈색으로 바뀔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번 뒤집고, 또 뒤집는다. 어떤 사람은 토스터에서 빵이 톡, 하고 올라오는 소리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 

그 쪽은 약간 분주한 아침과 어울리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오후 3시 또는 4시. 

점심을 먹고 오후의 일과가 시작하고, 그것이 직장의 업무이든, 글쓰기든, 청소든지 간에 

한 숨돌리는 시간의 식빵 굽기는 서두르기보다는 조금 번거로워도 버터를 녹이고 잼을 바르고, 

그렇게 손을 놀리면서 머리를 비우면서 그 굽는 행위자체가 단순하게 쉼이 되는 시간이 된다. 

그리고 그 단순하고 짧은 그 시간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오전에 남편 회사의 업무를 도와 일을 하고 오후에 글을 쓴다.

돈을 번다, 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행위들은 어깨를 굳게 하고 긴장하게 하고 눈에 힘을 주게 한다.

다행이 남편의 배려로 오후에는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얻었지만, 

정작 오전 내내 돈 버는 일을 하고 나면(바쁠 때는 점심 이후에도 몇 시간씩 일을 돕는다) 

오후엔 그저 머리를 텅 비워버리고만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쉽게 리셋이 되지 않는 영혼은 글쓰기도 싫어하면서, 쓰지 못하고 저녁을 맞이하는 것에도 서툴다. 

휴대전화의 SNS를 한번 주르륵 훑고, 별로 보고 싶지 않는 텔레비전을 켜보기도 하고, 

다음날 시험인데 평소에 보지 않던 뉴스를 끄지 못하면서 초조해하는 학생처럼 비비적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4시의 토스트는 번거롭지만, 머리를 비우고 다시 나를 정리하는 시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점점 중요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허기져서 (실은 그렇게 허기진 것도 아니면서 배가 고프다고 느끼고 싶어서) 

일어나 간단하게 만들어 먹었는데, 컴퓨터 앞이 아닌 실제로 고소한 냄새가 나고 누르스름하게 색깔도 바뀌는 

빵이 구워지는 과정을 통해 식빵처럼 차곡차곡 뇌와 육체가 정돈되는 경험을 하고서야 

음, 그런 의미가 있었군 하고 내 쪽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발견한 시간이다.


회사를 다닐 때 옆자리의 선배는 종이컵 안에 커피가 남았는데도 믹스 커피를 하나 들고 일어나 뜨거운 물을 받으러 갔다. 한 쪽에 체중을 싣고 기대서서, 컵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저었다. 

그렇게 탄 커피를 거기에 내려놓고 와도 상관없다고 할 만큼, 마실 커피가 필요하다기 보다는 

커피를 타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같이 보였다.

나중에 선배는 종이컵에게는 미안하지만 자기는 그렇게 작업을 정리하고 넘어간다고 말했다. 


두 번째 책을 계약하고 편집자를 만나러 출판사에 갔을 때 그녀는 그라인더로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주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라인더를 맷돌처럼 돌리면서 그녀는 참 행복해 보였다. 물을 끓여야 하고 원두를 갈아야 하고, 또 청소를 해야 하겠지만 그녀는 전혀 번거롭지 않은 듯 했다. 

오히려 수업시간 교무실에 간 선생님 덕에 쉬는 시간이 생긴 학생 같아 보였다.

검토해야 할 원고는 그대로 남아있고, 

진도를 빼기 위해 선생님은 보충수업을 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눈 앞의 그라인더를 돌리며 

그 위에 조용히 물을 따라서 흘러 넘칠 커피의 향만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는 눈뜨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한 아침이든, 나른한 오후든, 퇴근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밤늦은 시간이든 상관없이 굳이 그런 번거로운 시간을 만들고 만다. 

그저 손쉽게 연애기사를 클릭하거나 40% 할인이라고 제목이 달린 메일을 열어보는 대신 

그런 번거로움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머리를, 시간을 한 가닥씩 풀어준다. 


인생에는 약간 번거롭지만 그래서 좋은 것들이 있다. 

손으로 쓴 편지, 우체국에 가서 부치는 소포, 버너 위에서 한 덩이씩 굽는 고기, 팬에서 굽는 식빵, 그라인더로 갈아 내린 커피, 설거지 하기 귀찮지만 굳이 꺼낸 찻잔받침, 같은 것들.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나, 사실은 우리가 내심 그리워 마지않는 영원한 노스탤지어.


그 5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멀쩡한 호일 덮개를 두고 이빨로 열심히 요구르트의 플라스틱 용기 밑바닥을 뜯어 먹으며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 고 말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쉽고 멀쩡한 방법을 놔두고 굳이 번거로운 쪽을 택해 먹는 사람들이 먹은 것은

단지 요구르트 한 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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