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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Oct 25. 2015

자몽쥬스의 세계는

딱 500원 동전 크기만큼 옆으로 넓어진 세계  ​

일러스트 @황인정

가련한 귤 달콤한 오렌지 영리해 보이고 그리움을 자아내는 금귤 과즙이 풍부한 그레이프푸르트

시원한 과육의 감촉이 매력적이고 품위있는 자몽 과일로서 완벽하고 짙은 녹색 껍질도 아름다운 스위티와

맛이 소박한 데포콘 청량한 맛의 휴가나쓰 새침데기 이요깡 리큐르 같은 맛이 나는 조그맣고 노란 불수감과

향이 좋은 네이블 오렌지 큼지막한 멜로골드와 오로블랑코 .....


후아아...!

에쿠니씨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과일!과일!' 이라고 외치면서 좋아한다는 과일을 이렇게나 나열해놓았다.

12개 중에 아는 것은 오렌지와 귤, 그리고 자몽정도. 처음들어보는 과일도 있거니와,

영어단어를 일본식으로 발음해서 길게 늘어난 이름에 사람인냥 성격과 품성까지 묘사해서 겨우 몇줄을 읽는데 아찔하다.

스타벅스의 카라멜 마끼아또는 도대체 무슨 맛이냐고 묻는 하루키라면

'이거, 같은 일본에 사는게 맞습니까?' 라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몇년전, 갓 결혼을 해서 일본에 살때 지인의 집에 저녁식사를 초대 받아 간적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파스타에 크림이나 토마토 소스가 묻혀진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파스타가 나오는 것도

긴장할 만한 일이었는데, 입을 벌린 조개가 들어간 와인향 가득한 봉골레 파스타가 나올때까지

세등분한 옥수수와 삶은 풋콩을 까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낯설어

와, 세련된 식사다, 라고 생각했다.

그 때 함께 나온 것이 팩에 들은 자몽 쥬스였다.

오렌지 쥬스가 아닌 자몽 쥬스.

흔히 쥬스를 사면 오렌지 쥬스나 포도 쥬스아닌가? 특이하군, 하고 유리잔에 담긴 루비색의 묘한 음료를 마셨다. 새콤하면서도 달지 않아 삶은 풋콩을 까먹으면서 맥주 마시듯 들이키기 시작해 거의 한 팩을 나 혼자 마시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자몽쥬스를 찾아보니 오렌지 쥬스보다 50엔 정도가 더 비쌌다.

(우리돈으로 500-800원정도). 더구나 그 저녁식사에서 마셨던 팩은 조금 더 비쌌다.

하지만 에쿠니씨의 말마따나, '매력적이고 품위있는' 자몽 쥬스를 마시는 것이 무언가 우아한 세계로의 입문같아 그 매력적인 쥬스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약간 시큼하면서 쌉쌀한 맛에 오히려 돋는 입맛.

너의 피로를 회복시켜 주겠어, 나는 비타민 덩어리란다. 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저 껍질과 과육.

레몬을 보기만해도 상쾌하고 시큼한 맛이 기억나서 어깨가 움추러들며 침이 고이는 것처럼,

쥬스팩의 겉면에 그려진 루비색의 알맹이들만 보아도 침이 고인다.


오렌지와 비슷하지만 맛은 많이 다르다.

오렌지는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예쁘고 발랄한 아가씨같다면 자몽은 조금 어른스러운 소녀 같다.

한 모금을 마시고 남편이 말했다.

"이렇게 씁쓸한걸 처음엔 음료수로 마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답은 너무나 당연하다. 색깔이 너무 예쁘잖아!

이 오묘하고 멋진 루비색이 쌉쌀한 맛이 원래 멋진거, 라고 설득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불가리스 같이 몸에 좋은 음료를 주면 써니텐과 바꿔 달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으엑, 하고 밷었던 탄산수를 사다 놓고 마신다.

이제는 이런 쌉쌀한 맛까지 '맛'으로 포함하는 세계에 도달했다.

종류와 개수는 더 적었지만 50엔 더 비쌌던 자몽쥬스의 세계는 딱 500원 동전 크기만큼 옆으로 넓어진 세계다.

항상 마시던 오렌지 쥬스의 세계에서 딱 500원 동전만큼 비켜간 세계말이다.

누가 예쁘냐는 질문에 김태희와 이민정이 아닌 김효진씨가 생각나듯이 조금 비켜간 매력의 지대에 발을 담근 것처럼.


사람을 과일에 비교하는 것은 항상 즐겁다. (공효진씨는 낑깡같다고 생각한다)

나도 딸기나 수박보다는 역시 자몽, 같다고 해주면 기쁠것 같다.

완전히 동그랗고 묵직한 것이 좋은 자몽이라고 하니,

나는 좀 더 묵직해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걸릴듯 싶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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