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다가도 놀랍도록 대범해지곤 하는 엄마사람의 요리세계
언제였더라…오이 볶음을 해보았어,라고 엄마가 말하며 접시를 놓았을 때, 우리 가족은 뭐? 오이를 볶았다고요? 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김치에 젓갈을 넣는 것도 파격적인 우리 집에선, 그러니까 굉장히 비슷한 베리에이션에서 고만고만하게 반찬을 해먹었던 우리 집에서는 오이, 하면 포카리스웨트 광고에서처럼 등산이나 축구경기 후에 아삭, 하고 수분이 터져나오는 청량한 이미지가 떠올라서 그게 어쩌다가 프라이팬 위에 올라가게 되었을까 하고 기겁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이 볶음”은 실제로 많이 해 먹는 반찬 중의 반찬이었으나, 쪽수가 모자랐던 그날의 엄마는, “분명히 이런 반찬이 있는데,,,,,”하고 말꼬리를 흐려야만 했다. 우리는 “엄마도 참, 엉뚱해요,” 하고 하하하 웃으며 오이 볶음을 놀려댔다. 실제로는 오이 볶음의 존재를 몰랐던 나머지 가족들이 소리를 들어도 들을 일이지만, 그것이 낯설어야 할 우리 쪽 세계에 있던 엄마가 오이를 볶았다는 건 작게나마나, 깜짝 놀랄 사건이었다.
꽃꽂이를 하시는 엄마, 친구들 엄마처럼 이년아,라고 한번 부르지도 않고, 손바닥 한번 대지 않은 엄마가
가끔 이렇게 "만년 소녀이신 줄만 알았더니 역시 소녀는 아니었어!" 퍼포먼스를 하신다. 파프리카는 파프리, 인테리어는 인텔리,라고 무조건 세 단어로 줄여서 이야기하는 건 귀여운 편이다.
편식이 심해서 좀 새로운 음식이다 싶으면 먹지 않던 내가 장어구이를 열심히 잘 먹고 있자 신기하셨던지, “편식이 심하면서도 뱀 같은 건 잘 먹네”라고 말하셔서 뱀-을 상상해버린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잘 먹고 있는 애한테 왜 그러냐며 아빠에게 타박을 받으셨던 사건도 있었다.
내가 만화 대사 같은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내가 AB형이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가끔 저렇게 오이를 볶아보았어,라고 수년 만에 갑자기 새신부처럼 새로운 반찬을 만드시거나, 뱀 같은 걸 잘 먹네 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시거나, 김치찌개만 일주일을 졸여가면서 주시다가는 또 어느 날은 닭볶음탕과 LA갈비가 한꺼번에 식탁에 올라오거나 하면 역시 나는 엄마의 엉뚱함을 물려받은 거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등 제목만 들어도 씨-익 미소가 지어지는 만화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마스다 미리 씨는 그녀의 엄마 탐구생활, “엄마라는 여자”에서 아줌마들의 ‘놀랍도록 용감한’ 옷차림, 예를 들면 상의는 고양이 무늬 하의는 스트라이프(?) 같은 서로 다른 무늬의 옷을 코디하는 조화미라곤 눈곱 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차림에 대해 경탄을 표했는데, 나는 그 부분에서 위에서 언급한 “닭볶음탕과 LA갈비가 한 상에 올라온 날”이 떠올라 킥킥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엄마가 역시 조화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헤비한 메인 요리 두 가지를 한 끼에 내어놓는 대범한 차림새를 선보이면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새, 둘러앉은 가족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음식에 관한 글들을 읽다 보면 엄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어렸을 때 엄마가 만들어준 간식, 엄마가 최고 잘하는 찌개, 아프고 서러울 때 생각나는 엄마의 음식, 나이가 들어서야 이해하게 되는 엄마, 나와 똑같은 여자였던 엄마를 이해하고 뭉클해지는 스토리들.. 그런데 다행인지 유감인지 나는 아직 과거와, 그리고 현재의 엄마에 대해 그렇게 짠하고 애처롭게 기억하고 있지 않다.
(물론 엄마가 고생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엄마는 쌍둥이인 우리 자매를 25분 간격으로 낳으면서 정말이지 죽을 뻔했다. 그 이후 개척교회를 시작하신 아빠와의 고생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고생스럽고 힘든 세월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어쩌면 나보다 더 가열차게) 현재를 살아가면서 좌충우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흰머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염색을 하기 시작한 지 꽤 되어가는 엄마를 아직은 내가 돌봐야 할 존재가 아닌 아직도 이쪽에서 투정 부리고 싶은 존재로 여기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더 들어 속도가 느려지고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갈 때도 나는 엄마를 이렇게 난데없이 등장한 오이 볶음처럼 기억하고 싶다.
‘아침 일찍 도마 소리에 잠을 깨면 나를 기다리는 정성 어린 된장찌개’의 엄마는 아니지만,
‘필’ 받으면 오이를 볶아보았어,라고 수줍게 말하던 AB형의 매력적인 엄마로-
나는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