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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Nov 20. 2015

두부, 라고 말할 수 있는 두부를

 변화무쌍한 사건하나 없이 마음에 음영을 주는 심플한 맛

일러스트 @황인정


마더워터 라는 영화를 보았다. 좋은 영화다. 영화를 다보고 구글에 마더워터를 검색해서 나오는 스틸컷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영화다. 카모가와 강가에 핀 벚꽃 사진을 다시 보고 있으려니 그 분홍색이

마음에 번지는 것 같이 따듯해진다. 무더운 여름에도 마음은 따듯해질 수 있다.


마더워터란 위스키의 원재료로 사용되는 지하수를 지칭한다고 한다. 등장하는 세 여자가 모두 ‘물’이 중요한

커피, 위스키, 두부를 팔고 있기 때문에 정해진 이름인 듯하다. 커피를 만드는 장면이야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자주 봐서 그런지 쉽게 넘어가는데, 두부를 만드는 것과 위스키를 만들어 주는 장면은 몇 번이나 나오는 똑같은 장면임에도 집중해서 보게 된다. 미즈와리를 만드는 장면은 특히나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뭐 저런 장면을 일일이, 몇 번이나 보여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엔 저렇게 술만 타고서 휘휘 저어주는 음료에 돈을 받기도 민망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두 번째 다시 보여줄 때는 잔에 딱 맞으면서도 얼음을 젓는 수저만 들어갈 정도의 크기의 둥근 얼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엔 깨끗이 닦인 유리잔과 언제나 단정하고 새하얀 주인의 셔츠가 보였다. 깨끗하게 담을 잔, 좋은 재료. 그거면 되는 건데. 원래 진실은 단순한 법인데. 뭔가 이것저것 화려하게 꾸미지 않으면, 친절한 서비스가 없으면, 돈을 낼만하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 진짜는 시시해져 버린 세상의 나는 같은 장면이 세 번 천천히 반복되고 나서야 그 적당함과 적절함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두부가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두부가게 앞 벤치에 앉아 두부를 먹는다. 두부만, 간장에 찍어서.

반찬으로가 아닌 두부만 들고 먹는데, 할머니야 그렇다 쳐도, 젊은 청년조차 “맛있다” 라고 말한다.

나 역시 두부가 유명하다는 교토에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난젠지 근처의 두부가게를 찾아갔다. 물에 흰 두부를 끓여 간장에 찍어 먹는다. 아, 정말 이렇게 깨끗하고 깊은 맛이!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무엇이 맛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두부 맛 같은 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돈이 아깝다기보다 안타까웠다. 두부를 그렇게 많이 먹어왔는데, 마트에 가면 바구니에 담는 것이 달걀, 두부, 우유였는데, 그렇게 많이 먹어온 두부는 두부였을까? 두부 만드는 걸 보면 두부 못 먹는다는데, 그럼 내가 먹은 건 두부가 아닌가? 똑같이 하얀색의 두부지만 실제로 보면 먹을 수나 있는 것일까.


12년이 넘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 앉아 공부했지만 누군가 내 의견을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두 달 동안 불어학원을 다니다가 외국인을 만났지만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아직 여성명사 남성명사 배우고 있는데 말을 하라고? 당황하는 나에게 두 달을 배우고도 인사 한마디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당황하는 상대를 마주했을 때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두부를 만들고 있으나 두부가 아닌 것을 만들고, 공부를 하고 있으나 아는 것을 말할 수 없고, 그 나라 말을 분명 배우고 있으나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요상한 세상에서는 차가운 물에서 찰랑, 그리고 달랑 두부만 차곡차곡 담아 팔고 있는 가게 쪽이 오히려 낯설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반복되는 미즈와리와 두부와 일상들을 몇 조각씩 떼어서 보다 보면 나에게는 지루하다기보다 낯설고 신선하고 새롭다. 무시해오던 것들이 더 중요하게 눈에 띈다. 아침에 벤치에 앉아 두부를 먹는 시간, 같은 아침. 같은 영역인 듯하나 전혀 다른 공간인 저 마을에서 먹는 두부와 커피와 미즈와리는 변화무쌍한 사건하나 없이 마음에 음영을 준다. 


얼마 전 토크쇼에 걸그룹이 나와서 이번 앨범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었다. 왜 휘몰이 장단을 넣었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사장님이 좋아하셔서”.  당황하는 사회자들과 달리 정작 가수들은 그 대답의 어느 부분이 문제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 다른 토크쇼에 나온 여배우 역시 “막장드라마”라는 평가에 울먹이며 “저희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왜 그걸 몰라주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뭔가 가슴이 쓸쓸해졌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한 것으로 선악이나, 의도나, 평가가 좋고 나빠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열심히 춤을 연습하고 열심히 연기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냥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청률이 높고 화려해서 모두의 화제가 되지만 이야기는 말도 안되게 흘러가는 드라마의 주인공보다는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두부”고 어떻게 만드는 것이 좋은 두부인지 알고 있는 두부가게 주인이 정상 아닌가.


음, 두부를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기껏해야 두부, 그 정도 선에서 두부는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라고 말했는데 그런 심플한 두부 앞에서 심각하게도 주절거렸다. 하지만 못내 아쉽다.

두부를 꺼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위스키를 저을 때 얼음이 부딪히며 달그락 거리는 소리, 그 잠깐을 기다리며 존재하는 침묵까지 의미있는 순간. 그런 곳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까. 두부, 라고 말할 수 있는 두부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영화 안에서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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