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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Jan 01. 2016

차곡차곡 밀푀유

천 장의 패스트리처럼 하루 하루를 쌓아가는 것이 내 일이다


일러스트 @황인정



익히 들은대로 파리는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로 가득했다.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모양도 색깔도 아름다운 그 과자와 빵들을 밥 만큼 많이 먹었다.

아침에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함께 내주는 크로와상까지 맛있었다. 빵이 신선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디저트들은 특이한 발음만큼이나 특이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밀푀유 라는 파이가 있다.

빵이 아니라 패스트리로, 천 장의 나뭇잎이라는 뜻이다. 천 장이라는게 과장이 아닌것이,

보통의 패스트리에는 한 장에 729개의 층이 있는데, 밀푀유에는 두 장 또는 그 이상 들어간다고 한다.

그 사이에는 커스터드 크림이나 생크림을 바르고 과일을 넣어서 다시 패스트리로 포갠다.

숙소 앞에 있던 빵집에서 산 밀푀유는 커스터드 크림을 패스트리 사이에 굉장히 두껍게 끼우고

맨 위에는 굳힌 설탕을 얹고, 천장의 나뭇잎이라는 뜻이라서 그런지, 나뭇잎의 잎맥 모양으로 장식을 했다.

달고, 달고, 부드럽다. 그야말로 입안에서 녹는다.

하지만 케이크처럼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녹는 크림사이로 바삭바삭했던 패스트리가 눅눅해지면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녹아가는 과정을 한번 더 즐길 수 있고,

입은 포만감을 느낀다.


한 층 한 층 쌓은 것을 한 입에 넣지만 그 층과 겹과 그 사이의 빈 공간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차곡 차곡 쌓아서 생기는 맛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궁지에 빠진 표정 밖에는 보이지 않는 얼굴, 내가 스스로에게 저지른 일, 그 58년 동안 어찌어찌하여 만들어진 뒤죽박죽의 무엇, 흐릿하고 지친 눈빛, 거칠어진 코, 제 시큼한 독에 찌푸린 듯 양쪽 끝이 아래로 내려와 찡그린 입술, 근육이 처진 뺨, 쭈글쭈글 주름져서 늘어진 목"   <싱글맨>

싱글맨 속 거울에 비친 얼굴을 묘사한 부분을 읽다보면 이런 한 장 한 장의 세월을 실감한다.

지금의 내 몸뚱이, 손등의 주름도 저 위의 문구처럼 내가 스스로에게 저지른 일이다.

어릴 때는 물론이고, 고등학생 때까지도 로션이나 크림의 향이 싫어서 손이 터서 피가 나도 크림을 바르지 않아 많이 상하고 주름이 많다. 예전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때는 "선생님, 손이 할머니 같아요" 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금은 가방 속에 항상 핸드크림이 들어있고 손을 닦고 나면 수시로 바르지만, 이미 관절이 있는 부분은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하루에 생긴것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겉모습만 그런것이 아니다.

내공이라는 것, 실력이라는 것 (물론 재능이라는 것을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그런것도 결국 한장 한장 쌓아 온 세월이라는 걸 손등이나 목의 주름처럼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어느 개그맨의 농담처럼 요즘은 "티끌 모아 태산", 이 아니라 "티끌 모아 먼지"거나,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정말 늦은 것"같은 세상이기도 하지만, 그 티끌 같은 세월을 조금 살아보니 역시, 미천한 지금일지라도 그게 다 티끌 같은 세월이 쌓여서 온 것이라는 걸, 성실하게 보낸 어느 하루 하루와 방탕하게 흘려보낸 어느 하루하루가 나름대로 쌓인 것임을 절실히 느낀다.
그렇게 얇은 패스트리 한 겹 위에 또 한 겹 올려봐야 저울의 추가 기울기나 할까, 그 두께가 변하기나 할까 라고 의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우리가 보내는 하루의 실제일지 모르나, 분명히 쌓여서 지금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날 잡아서 10시간을 앉아 있으면 A4 종이 한장 분량을 뚝딱 써낼 것 같아 시간이 여유로울만한 어느 날로

미루고 미루지만, 그 어느날은 오지 않는다. 아니, 뚝딱 써내는 날이 있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오랜 시간 머리 속 한쪽 구석에서 문장들이 한 겹 한 겹 쌓이고 있다가 그것이 정리 되는 시간을 만난 것 뿐이다.

이 문장 하나, 저 문장 하나,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장들을 쌓다가 답답해지면, 좋아하는 책을 뒤적거린다.

이승우 작가는 책을 뒤적거리고 있으면 무언가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잠자고 있던 정신, 무뎌져 있던 감각, 흐릿해져 있던 열정 같은 것이 밝혀진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게 뒤적이고 있으면 뭔가 살아나는 느낌을 들게 하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문장 말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기억나게 하는 문장은 마치 커스터드 크림과 같다.

매끄럽고 유연하게 서로 상관없던 문장들 사이로 흘러들어간다. 쓴 것을 다시 읽으면, 그렇게 흘러넘치는 크림 사이로 한 때 바삭바삭했던 설익은 생각들이 여전히 입안에 느껴지지만 이제는 먹을만한 것이 되어 넘어간다.

내가 할 일은 커스터드 크림을 만날 때까지 성실하게 차곡차곡 더 실한 패스트리를 쌓아가는 것이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라는 이동진 작가의 좌우명처럼 하루 하루를 쌓아가는 것이 내 일이다.

그 위에 과일이 올라가든 크림이 더해지든, 나뭇잎모양의 장식으로 마무리 되든,  

그것은 내가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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