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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Sep 04. 2015

아저씨들의 수제비

초등학교 뒷마당의 저녁을 클라이맥스로 이끄는 시원시원한 맛.

일러스트 ⓒ황인정



입추가 되자 끈적끈적했던 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바뀌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삽화를 그려주는 인정 씨는 그것이 신기한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성실하신 거라고 말한다. 음, 그렇다. 신기한 일이 아니다. 성실한 일이다. 

여름이면 여름답게, 가을이면 가을답게, 성실하게 흘러가는 계절을 우리는 성실하게 만끽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여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여름이야기 하나 더. 


다니고 있는 교회가 많이 커져서 지금은 각 부서별로 수련회를 가지만, 어렸을 때는 함께 자라 서로 다 아는 가족들뿐이라, 수련회라기 보다는 좀 더 북적북적한 가족 여행을 가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동해로 갔을 때는 초등학교에서 잠을 잤는데 신나게 수영을 하고 돌아오면 한 사람씩 식판을 나눠줘서 젖은 머리로 식판을 들고 뒷마당에 줄을 섰다. 강가도 아닌데 개구리가 우는 것 같다. 해는 지기 시작해서 초등학교 뒤로는 치즈처럼 길게 늘어진 해가 온통 하늘을 붉게 만들었다. 주위에 건물이 없으니까 하늘 전체가 밤이 되려고 뒤틀며 녹아 들어가는 것이 그대로 다 느껴져서, 더욱더, 어린 나이에도 도시가 아닌 시골의 여름 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뒷마당에는 난닝구(?)만 입은 남자 어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솥 앞에 서있다. 장작을 피웠나, 그럴 리 없지, 분명 휴대용 버너 위에 조금 큰 냄비를 올려 놓은 것이 상식적인 방법이겠지만 내 기억에선 (초등학교 3-4학년의 기억이니까 실컷 과장해 보겠다) 엄청 큰 장작 불 앞에서 가마솥 같이 김이 펄펄 나는 솥에 큰 동작으로 반죽을 뜯어 넣는 연기를 하는 아저씨들의 연극 무대가 펼쳐진 것 같았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 어른 한 분이 국자로 수제비를 퍼주면서 자신의 농담에 스스로 껄껄 웃으며 한껏 분위기를 띄운다. 바다에서 수영을 한 탓에 피곤하고 배가 고픈 우리가 식판을 들고 가면 아저씨들끼리 만들었다는 수제비를 퍼주는데, 

“손 안씻었지롱~.” 

그러면서 때가 낀 손톱을 보여주면, 

“우엑, 더러워!” 

하면서 울상이 된 우리를 보고 아저씨들은 재미있다는 듯 크하핫, 장난꾸러기 도깨비들처럼 웃어댔다. 하지만 배가 고픈 우리들은 이내, 설마 진짜 그 손으로 만들었겠어? 라면서 감자가 부서져서 진득하고 노란 수제비를 두 그릇씩 먹어 치웠다. 그것이 여름의 수련회였다. 실력 좋은 엄마들이 아니라 남자들이 만든 수제비! 엉터리일 줄 알았는데 너무나 맛 좋았던 그 수제비가 여름 수련회의 백미였다. 아, 그리워라. 

그래서 그런지 수제비, 하면 남자의 메뉴라는 인상이 강하다. 식판에 한 국자씩 퍼주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초등학교 뒷마당의 저녁을 클라이맥스로 이끄는 시원시원한 맛. 


여름이 간다.

성실하신 그분 덕분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가을에는 뭘 먹었더라……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는 먹어본 적 없지만 분명히 가을의 기억을 담고 있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스무 살의 가을이든, 초등학교 뒷마당에서든, 낯선 나라의 시장에서든 간에.

바람이 조금 서늘해졌을 뿐인데 떠오르는 건 이렇게나 많다니! 

다시 돌아온 계절만큼이나 나도 꽤 성실한 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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