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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보로봉 Sep 10. 2015

일본식 이탈리안, 밀휘오리

오늘은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일러스트 ⓒ황인정



그래도 푸드 에세이인데, 음식이야기는 별로 없잖아! 라고 하는 분들을 위해

오늘은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음,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좋아하는 가게는? 단골집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최근에 찾아낸 ‘밀휘오리’라는 이탈리안 가게다.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가게 앞에 세워둔 칠판의 문구가 좀 수상해서 들여다 보았다.


“외국에서 날아온 힘없는 야채 말고 시골에서 올라온 건강한 채소를 먹고 힘을 얻읍시다!”

말투가 영 어색한데다 꾸며놓은 모양새도 일본식 이탈리안이다. 일본식 이탈리안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한국의 것보다 가볍다고 할까, 일단 정성스럽게 꾸미지만 조금 조잡스럽다. 항상 그렇듯이 휑하고 삭막한 거리에 갑자기 등장한다.

알록달록한 만화에 등장하는, 뭔가를 잔뜩 올려서 휘청휘청하지만 아슬아슬하다기 보다는 활기찬 그런 수레 위에 실려 다니는 가게. 깃발이며 가짜 담쟁이 덩굴이며 오크통이며 자기네 공간에는 꽉 채워 놓고선 옆 상가가 비어있어도 그 앞에 입간판 하나 놓지 않는다.

불이 꺼진 가게에 들어가니 일본인처럼 보이는 주인이 어눌한 한국어로 저녁에만 문을 연다고 하면서 메뉴가 적힌 커다란 액자를 가져온다. 돼지고기는 전날 주문해야해요, 라고 말하는 주인에게 그럼 내일 저녁에 부탁드립니다. 라고 예약을 해버렸다. 요리를 전날 골라서 예약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생소한 절차에 조금 흥분했다.

다음날 함께 간 친구들도 커다란 액자에 적혀있는 메뉴에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메뉴를 볼 때마다 그 큰 액자를 서로 끙끙대며 가져와야 한다. 이 테이블에서 저 테이블로 커다란 액자가 옮겨질 때마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같이 웃는다. 정말이지 비효율적이지만, 덕분에 작은 가게 안의 사람들은 팬더라도 한 마리 돌아다니는 것처럼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흥이 올랐다.

식전주로는

‘강원도 정선 솔향 강릉 농장에서 공수해온 6가지 종류의 고랭지 야채를 갈아 만든 주스’  

를 준다(참 길죠). 메인 요리들의 이름도 길다. 하지만 거창해도 허망한 내용은 아니다. 별 것이 아닌 걸 포장하느라 허황된 말을 이리저리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어디에서 온 재료들인지 꼭 알리고 싶은 것이겠지 싶은, 꼼꼼히 읽어주고 싶은 메뉴다.

우리가 주문한 것은 전날 미리 부탁한,

‘밀라노식 카스레츠’
바삭하게 구운 돈가스 위에 생프로슈토를 깔고 모차렐라 치즈, 프레쉬 토마토, 바질을 듬뿍 넣은 켓카소스를 가득 얹어서 개운하게!

그리고,

향기로운 허브 시소와 함께 먹는
‘명란젓갈 스파게티’

‘껍질을 바삭하게 구운 대하를 넣은 부드러운 토마토소스‘
세계 3대 미과인 망고와 망고스틴을 넣어 끓인 토마토소스 – 굵은 파스타 파파로델레로  

라는 이름의 요리다. 액자 메뉴에 적힌 그대로 옮겼다(참 길죠). 전날 주문했는데도 나오는데 한참 걸린 카스레츠는 위에 깔린 생햄이나 튀겨진 고기가 정말 부드러웠다. 명란젓갈 스파게티는 아, 스파게티도 신선할 수가 있구나, 라고 생각할 때 탱탱한 면과 함께 명란젓이 고소하게 씹힌다.

이런걸 만 오천원씩 내고 먹어야 돼? 서울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파스타 집과는 너무 달랐다. 마치 올림픽에 참가한 유도선수가, 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라며 태극기가 바느질된 유도복을 두 주먹으로 쾅쾅 치며 등장하는 것처럼, 각 지방에서 자부심있게 자란 야채와 재료들이 자신의 건강함을 가슴 쫘-악 피고 자랑하는 그런 요리들이었다.  


나는 “구색을 맞추는 것”을 질색한다. 남의 사정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지만 대충 구색을 맞추는 것처럼 싫은 게 없다. 해야 되니까 어쨌든 어느 정도 맞춰서 하자는 것들. 유기농을 파니까 유기농, 이라고 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유기농을 좋아하니까 일단 유기농이라고 써놓고 실제로는 유기농이 아니거나, 들어있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 정도로 넣는 것. 뭐 이런 식의 순서가 바뀐, 필요충분 조건이 잘못된 상항을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이렇게 메뉴에 적힌 재료들이 성실하게 제 역할을 하는 요리들에 기쁨을 넘어 충격을 받는다. 예전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홈메이드 잼을 먹고 “내가 잼이라고 알고 있던 것은 잼이 아니었나봐!”라고 외쳤던 순간처럼, 비용절감이라는 이유로 변해버린 메뉴들의 오리지날 버전을 만나게 되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아, 이렇게 오리지날의 세상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식사와 함께 마신 진저 에일이라던지, 다른 메뉴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아서 아마 나중에 밀휘오리가 한번 더 등장하지 않을까 한다. 그나저나, 밀휘오리는 무슨뜻일까, 이탈리아어의 일본식 발음인 것 같은데. 궁금하지만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두둥실 수레 위에 담긴 구름의 이름인 것처럼, 차라리 뒤뚱거리는 오리를 연상할지언정, 오히려 세련된 실제 뜻을 알고 나면 왠지 시시해져 버릴 것 같다.

그래서 아직도 밀휘오리는 그냥 밀휘오리입니다. 여러분도 굳이 찾아보지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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