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 울리던 너의 샤우팅
우리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숱이 많았다.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대머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태어난 직후의 아주 풍성한 머리숱은 나에게 신기한 광경이었다.
정말 머리숱이 풍성한 나머지, 아이의 신체 크기를 제외하면 정말 어디서 몇 달은 자라고 우리에게 온 것 같았다. 뭐 출산할 시점에는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머리숱은 굉장히 자라서 나중에는 머리가 흩날리는 수준까지 자라게 되었다. 이런 머리는 의외로 관리가 쉽지 않았다. 아이를 씻길 때마다 안쪽까지 씻기지 않으면 각질이 쉽게 생기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각질 때부터 좀 고민을 했었다
.
이런 머리숱은 처음에는 그다지 관심이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신경 쓸 구석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00일 사진 찍을 때까지도 그러했다. 아이가 머리가 길든 말든, 우리 부부에게는 그저 아이가 건강하고, 통잠을 잘 잔다는 것만으로도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리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하염없이 자랐고, 펌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풍성하고, 길게 자라나게 되었다. 100일이 넘어가니 우리 부부의 정신없던 마음에도 볕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갈 겸 이제 머리를 잘라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개인적으로 정답을 모른다면, 오답을 걸러내서 정답을 찾는, 이른바 소거법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라, 아내의 말을 듣고선 흠 안 나갈 이유는 없으니 좋다고 답변하였다.
그런데 아이의 머리를 한 번도 잘라본 경험이 없던 우리에게 머리를 자르는 결정 이후, 어떻게 잘라야 할지는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래서 열심히 구글, 네이버도 찾아보면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깨끗하게, 짧게 깎인 아이의 머리의 이미지였다.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이고 너무도 귀여워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말이었다. 사실 그 시점까지 아이를 바라볼 때는 책임감이 나를 지배하던 시기였는데, 아이가 너무나도 귀여워 보였다. 그래서 결심하였다. 이른바 이발기이라고 하는 이발기를 사서 직접 아이의 머리를 자르기로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에 내 머리도 잘라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용기를 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때는 아이가 움직이지 않으니 이런 결정이 가능했던 것 같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아기는 그야말로 돌아다니는 폭탄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때 몰랐다.
그렇게 며칠 후 주문 한 이발기가 집에 도작하였다. 나와 아내는 우선 거실에 있던 많은 장난감을 정리하였다. 머리카락이 주위에 흩날릴 텐데 정리하기에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웃긴 것은 우리를 괴롭힌 것은 자른 머리카락을 치우는 문제였는데 당시에 이 고민은 모두 하지 않았다. 수면이 부족해지면 생각해지는 능력이 떨어진다는데 정말 딱 그런 순간이었다.
아이는 아직 활발하게 움직일 수 없으니, 우리의 의지에 따라 이제 가운을 입고 아내의 품에 앉혀졌다. 나는 이발기가 가급적 머리에 완전히 닿지 않도록 적당히 긴 커트 길이로 세팅하고 천천히 아이의 머리에 대기 시작하였다.
이잉 소리와 함께 아이의 머리카락은 잘리기 시작하였고 두상이 완연히 보이는 모습으로 재탄생되었다. 반질반질한 모습에 나와 아내는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정말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내 자식이라 당연히 귀엽다고 한 아내도, 지금 이 모습이 더 귀엽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잘 깎아가던 중, 반복되는 이발기의 위잉거리는 소리에 아이가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울음이 터진 것이었다. 아이의 울음은 아이 특유의 복식호흡의 힘을 빌어 더욱 커지기 시작하였다. 큰일이었다. 아직 옆이나 테두리의 디테일한 부분은 제대로 밀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아이의 머리를 살짝 잡고 조금씩 자르는데, 혹여나 아이가 다칠까 봐 자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10여 분간 씨름 끝에 결국은 자르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가까이서 보면 조금 자르다 만 티가 좀 났지만, 멀리서 보면 의젓하고 귀여운 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략 머리 자라는 일을 정리하려고 이제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의 잘린 머리카락과 아이 몸에 묻은 머리카락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잘린 머리카락은 가운에 있으니 어떻게든 걷어낼 수 있겠지만, 몸에 은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로 나와 아내는 욕실로 아이를 데려가 예정하지도 않은 목욕을 시켜야 했고, 민감해진 아이의 맘을 달래기 위해서 물놀이를 욕조에서 함께 해줘야 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갑자기 예정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평소에 머리는 30분 내에 자르는 일정으로 충분했던 나에게 꽤나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때가 리즈시절이었던 것 같다. 적당히 움직이면서 재롱을 부리면서 이쁜 두상을 우리 부부에게 들이밀듯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추석까지는 머리에 대한 걱정 없이 지냈던 것 같다. 추석 때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였을 때도 아이는 귀엽다는 말을 친척과 할아버지에게 연신 들으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다시 흘러 2024년이 되었다. 설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명절은 빨리 돌아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 아이의 머리는 정말 많이 자라 버렸다. 귀를 덮었고, 특히 뒷머리는 목을 덮어가고 있었다. 뭐랄까 한 때 남자들이 하던 헤어스타일 중 울프컷이라고 뒷머리만 길게 커버하는 형태가 있었는데, 그 형태와 매우 유사하였다. 점잖은 것을 중시하는 어른들은 한 마디씩 하기 딱 좋은 헤어스타일이었다.
이번에는 지난번 같이 고생하기가 싫었던 지라, 자본주의의 힘을 빌어 미용실에서 자르기로 부부간에 합의를 거친 후 미용실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어떤 미용실이 아이 머리를 자를 수 있는지는 물어봐야 하기에, 아내에게 미용실 탐색을 부탁하였다. 개인적으로 전화통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용실 한 곳을 예약하였다. 예약제 미용실이었던 탓에 일정이 제한되어 있어서 우선 가능한 시간을 잡았다. 그런데 잡고 보니, 토요일 오후 4시로 내가 수락산 등반을 다녀온 직후였다. 뭐 괜찮겠지 하고 우선 아내에게 그 시간 그대로 진행하자고 말하였다. 돌이켜보니, 그날 정말 힘들었지만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샤워를 두 번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이 다가왔다. 등산을 마치고 집에 오니 3시 54분이었고, 나는 아이를 바로 안고 집을 나섰다. 바람막이 안쪽의 내 속옷에서는 땀이 엄청나게 흘러 옷이 흥건하게 젖어있었지만, 약속시간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후다닥 미용실로 향하였다. 미용실에 도착하니, 원장님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아이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빠른 커트에 능숙한 원장선생님을 예약한 것 같았다.
아이가 앉을 수 있는 의자는 없기 때문에, 내가 우선 가운을 입고 아이에게도 가운을 입힌 뒤 내가 아이를 안고 의자에 앉았다. 긴장 속 원장선생님은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한 3분간은 아이는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은 전체적으로 머리를 자르는데, 나에게 아이 칭찬을 하기 시작하셨다. “아이가 조용하게 잘 자르네요”
그 말이 신호탄이었을까? 아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최근 들어 더 크게 우는 법을 터득한지라, 울음의 볼륨은 커지기 시작하였다. 예약제 미용실이기도 했지만, 4시라는 애매한 시간이라 손님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꽤나 불쾌하게 들릴만한 울음소리였다. 정말 우렁찼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서둘러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였다. 앞머리는 그렇게 빠르게 다듬을 수 있었다. 문제는 옆머리와 뒷머리였다. 옆머리는 귀와 맞닿아있고, 뒷머리는 목 뒷덜미에 붙어있다 보니 자칫하면 상처가 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군생활 중에 선임의 실수로 뒷머리 중 일부가 아예 뿌리째 뽑힌 적이 있는데, 그때 생각이 났다. 조심해야 하는 순간임을 직감한 게 아닐까 싶다.
그때 나는 기지를 발휘해서 아이가 나를 보도록 아이를 돌려서 안았다. 그렇게 하니 아이는 나에게 안기기 시작하였고 이때를 틈타 원장선생님은 뒷머리를 자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조금 잘랐다. 아무래도 아이는 이발기가 내는 소리가 굉장히 무서웠나 보다. 다시 아이는 크게 울기 시작하였다.
옆에서 보다 못한 다른 선생님이 오셔서 나에게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줘도 되는지 물어봤다. 나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아이패드를 가지고 오셔서 화면을 다 덮고 소리만 들려주시면서 아이 앞에서 손짓 발짓 율동을 하면서 아이를 달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모르셨다. 이 시기쯤 아이는 아직 울음을 멈출지 모른다. 다만 다른 곳으로 집중을 돌렸을 뿐이다.
나는 결국 두 번째 기지를 발휘하였다. 일어서서 아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꽉 안았다. 특히 이마를 붙잡았다. 이 스킬은 소아과에 가서 아이 콧물 흡입을 시도할 때 선생님이 알려주셨던 스킬이다. 그렇게 꽉 안고나니 옆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새롭게 배운 하나의 스킬이 있었다. 바로 머리를 축 늘어뜨리는 기술이었다. 아이고… 여기서부터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머리 자르는 것을 멈췄다.
선생님께서는 윗부분 머리의 숱을 좀 치시다가 이 정도면 그래도 된 것 같다고 말씀 주셨다. 나도 아이도 30분간 지속된 혈투 속에 우선 멈추는 게 좋다고 판단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이의 몸은 당연하고 내 몸과 옷 속, 심지어 신발 속에도 머리카락이 한가득이었다. 다 털기에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기다려줄 수 없었다.
연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얼른 계산하고 미용실 바깥을 나섰다. 아이는 미용실 바깥을 나서니 바로 귀신같이 눈물을 감추고 울음을 멈췄다. 집에 와서 보니 유모차에도 머리카락이 한가득이었던지라 뭐랄까… 미용실에서 자르나 집에서 자르나 별반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미용사님이 훨씬 전체적인 구조상으로는 잘 잘라주셨지만 말이다.
나와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 같이 샤워를 하였다. 욕조에 물을 담아놓고 아이와 같이 들어가니, 내 곁을 떠나지 않던 아이는 조금씩 물장난을 치면서 이내 머리를 자르기 전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아이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이를 안아주면서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머리를 자르는 대공사가 끝났다.
문득 머리를 자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치과는 어떻게 가지라는 공포스러운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난 어렸을 때 기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인데, 치과나 병원에 간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병치레를 많이 했다는데, 병원에 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두 개 중 하나다. 정말 기억이 안 나거나,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때인데, 아이를 보니 한숨이 났다.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비하면 머리를 자르는 것은 정말 쉽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울음만으로 대화하는 시기는 이제 1년 남짓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느낌이 이상해진다. 이때 내가 약간의 귀찮음을 감당하면 돌아오질 않을 이 시간이 굉장히 귀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함께 든다. 짧다면 짧을 이 육아휴직 기간 중에 아이와 많은 추억을 쌓았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아이는 항상 부모를 용서한다”라는 말이었다. 물론 크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이도 오늘 머리를 자르기 위해 자신을 속박(?)한 나를 많이 용서해주지 않았을까? 아이를 통해 나도 배우고, 시간도 이렇게 조용히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