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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g ho Lee Apr 14. 2024

04. 외할머니댁 첫 방문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100일 정도시간이 흐른 이후부터는 아이를 외부에 데리고 다녔던 것 같다.  어느 정도는 통잠을 자게 되니, 나도 아내도 마음에 대한 여유가 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방문하지 못한 곳이 있었다. 바로 나의 외할머니댁이었다.


서울이나 경기에 모든 식구들이 모여 살았던 탓에 1시간 내로 이동하면서 수면시간을 조절하면 뵐 수 있었지만 외할머니댁은 예외였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전주에 거주하고 계셨던지라 전주까지의 이동거리는 굉장히 허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외할머니를 꼭 찾아뵙고 싶었기 때문에 아내에게도 종종 외할머니 댁에 찾아뵙자고 말하곤 했다.


아이와 함께 이동하는 게 꽤나 부담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 댁에 가고 싶었던 것은 나에게 나름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집안의 어른으로서 자리를 오래 지키신 것도 주된 이유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보다 더 대단하게 생각했던 것은 삼촌과 이모들의 모습이었다.


삼촌과 이모는 어디에 계시든 항상 매년 온라인으로라도 함께 시간을 나누시고, 한 분이 일이 생기면 다 같이 하나 되어 챙기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다. 어떻게 이런 가족을 만들었을까? 어른이 되면서 이런 모습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나에게는 이런 가족의 모습은 롤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기 전 아내를 보기 위해 외할머니는 서울에 올라오셨고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신 적이 있다.  시끌벅적한 카페 한 구석에서, 다른 말씀을 하시기 보다는 아내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모습은 아내에게도 굉장히 큰 인상을 주었는지 아내는 그때 기억을 몇 번 말한 적이 있다. 어떠한 평가를 하기 전에 응원부터 해주시는 모습, 외할머니의 모습은 나에게 롤모델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결혼하기 전에도 내가 전주에 내려갈 때마다 나를 위해서 정성껏 꽃게탕을 손수 끓여주시면서, 항상 따뜻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챙기고 항상 기도해 주셨다. 이런 할머니를 계속 뵙지 못해서 아쉬웠기에 아내에게 아이의 돌이 지나고 나면 함께 꼭 찾아뵙자고 말했었고, 육아휴직을 결정하면서 3월에 전주에 방문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잘 내려가지 못했던 내가 내려간다고 하니, 큰 이모부터 시작해서 나의 외사촌들이 총출동해서 함께 모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방문까지 하루가 남았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다. 아이가 아픈 것이다. 급히 KTX를 취소하고 사정을 설명하고 일정은 다시 무기한 연기되게 된다. 이후에 친척들이 모인 사진을 보니 할머님은 아픈 몸을 이끌면서 정말 또 음식을 준비하셨던 탓에 너무나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어서 아이는 노로바이러스까지 걸리고 완전히 완쾌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나에게 먼저 4월 초에 외할머니 댁을 다녀오자고 제안하였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두말없이 바로 표를 예약하였다. 그런데 표를 막상 예약하려니 고려해야 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3월에 예약할 때도 그러했지만 우선 편도 시간은 2시간을 넘어서지 말아야 했다. 아이는 고정된 자세로 오래 있으면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시간 미만의 기차를 보니, 2시간을 넘지 않는 것은 KTX 산천이 유일하였다. 아쉽게도 산천은 돌아오는 기차는 있었지만 가는 기차는 없었다. 두 번째로 아이의 수면시간을 피해서 예약해야 했다. 아이는 12시 30분에 낮잠을 자고, 8시 30분에 저녁잠을 자야 한다. 따라서 그 시간은 피해서 이동을 해야 했다.


아! 그런데 전주로 가는 열차가 이렇게 빨리 매진되는지 몰랐다. 2주 전에 예약하니 나름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거진 매진되어 있었다.  결국 전주로 가는 열차는 2시간 20분 걸리는 KTX를 예약해야 했고 이 열차는 12시 30분에 전주역에 도착하는 열차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돌아오는 열차는 KTX 산천으로 1시간 40분 정도 걸려 18:34분 도착이었다. 돌이켜 보면 만약 돌아오는 열차가 2시간 20분이었으면 우리 부부는 좀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아이가 30분 넘게 짜증을 부려서 나는 30분 내내 열차를 돌아다니면서 아이를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출발 당일이 왔다. 아이를 데리고 순조롭게 역으로 이동하였다. 태어나서 가장 많은 사람을 역에서 본 아이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대다가 열심히 사람 사이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니, 출산 전에 나에게 에버랜드 같으면서 사람이 적은 공원을 추천해 주던 지인이 갑자기 기억났다. 아이가 열심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데 문득 아이를 잃어버리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를 잘 데리고 기차에 탔다. 아이는 연신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나와 아내의 좌석을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자신의 과자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 앞 좌석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귀여운 척도 했다. 다른 승객분에게 불편을 주는 것 같아 힘들었지만, 아이라서 그런지 다른 승객분들은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워해주면서 아이의 장단에 맞춰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와 함께 이동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진짜 힘든 시간은 도착하기 10분 전이었던 것 같다. 아이는 12시 20분쯤이 되자, 갑자기 세모눈을 하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다. 아이는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아이는 졸리면 보통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시끄럽게 소리를 내곤 하는데,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아이를 안고 승객칸을 나가 화장실로 이동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아이의 울음을 달래다 보니 전주에 도착했다.  그새 아이는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이 장흥에서 올라오셔서 우리 부부를 데리러 왔고, 아이를 안고 나는 외할머니댁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10분 남짓되는 시간이었지만 아이는 아주 쿨쿨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고, 내 어깨 한쪽은 완전히 침으로 젖어 있었다. 아이를 업고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깨에 올려놓고 고정할 수 있는 천이 있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옷이 항상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 매일 옷을 빨래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 옷을 모두 매일 빨래하는 게 쉽지 않다.


외할머니댁에 드디어 도착했고, 외삼촌이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외할머니가 “우리 새끼,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라고 말해주시면서 반가웠다. 먼저 자주 방문했어야 했는데 너무 죄송하다는 마음부터 들었다. 거실 중앙에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반찬이 깔려있었다. 이번에는 혼자 갔으니, 그냥 찌개에 반찬만 있어도 상관없었는데, 반찬개수만 봐도 10여 첩은 될 정도로 많은 반찬이 눈앞에 보였다. 감자탕과 다양한 나물들이 한가득 있었다. 여기서 생선도 인당 한 마리씩 준비해 주셨다.


다들 우리 가족을 기다리셨는지, 바로 외할머니는 이제 밥을 먹자고 하셨다. 다들 앉자 외할머니는 항상 그러하셨던 것처럼 식전기도를 대표로 하셨다. 과거에는 할머니 목소리를 들으면 작지만 선명하고 끊어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날의 기도는 그렇지 않았다. 중간중간 소리는 끊겼고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들리기 시작하였다. 그새 시간이 많이 또 흘렀구나라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쳐나갔다.


그렇게 길었던 기도가 마무리되고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아이가 깨어나버렸다.  적어도 이 때쯤에는 2시간은 자야지 우리 부부의 하루가 잘 편안히 마무리될 수 있는데 아이가 깨어나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 목소리가 자꾸 들려서 그런가 보다. 처음 보는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지 아이는 금세 내 품에 와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고 이 상태로는 밥을 먹을 수 없었기에 아내와 돌아가면서 밥을 먹기로 하였다. 20여분 정도 열심히 아이를 달래 보았지만, 아이는 잘 기색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아이를 잠깐 봐주시기로 하였다. 아버지는 조카를 먼저 키워봐서인지 요령이 있으셨다. 아이를 앞으로 들고 바깥 풍경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광경에 아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바깥을 두리번대기 시작하였고 나와 아내는 그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과식을 하면서 밥을 두 공기나 해치우면서 말이다. 외할머니와 외숙모님이 이렇게 많이 준비해 주셨는데 못 먹겠다는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이제 아이를 거실 한가운데 풀어놓으니, 아이는 처음 보는 친척을 두려워하여 내 품으로 다시 뛰어왔다. 하지만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과 최근 좋아하기 시작한 패트병(!)을 주니 아이는 경계를 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나게 뛰어다니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비해 외할머니와 외삼촌 내외분들도 아이를 보는 것이 오랜만이었던지라, 모두 동참해서 아이를 놀아주었다.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가족들은 웃고 기뻐했다. 중간에 아이를 하나 더 낳는 게 어떻냐는 질문이 기습처럼 왔지만, 웃음으로 적절히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그전보다 더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 있어서 그런지 정말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외할머니는 아이를 보면서 내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며 정말 귀여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해 주셨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본 유일한 손자로 외할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났을 때 동네를 돌면서 기뻐하셨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탓에 나는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익숙했는데, 막상 내 기억에는 외할아버지는 없다. 정말 어릴 때였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는 어떨까? 내가 외할머니댁까지 데려간 이 시간 속에 일어난 일과 사람들을 얼마나 기억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잠깐이었지만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구나”라는 생각이 지나갔다.


한 시간 정도 아이는 정말 어른들이 주는 과일과 전병을 열심히 집어먹으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렇게 수면시간을 지나 각성한 채로 뛰어다닌 아이는 슬슬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더니 잠투정을 부리며 얼른 재워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촌 방에 이불을 깔고 아이를 뉘었더니 아이는 몇 분도 되지 않아 바로 잠자기 시작하였다. 다행이었다. 이때 안 자면 저녁까지 엄청난 투정을 받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런 사소한 것 하나에 감사함을 참 많이 느끼는 것 같다.


한 시간 정도 재우고 나니, 기차 출발시간까지 40여분 정도 남은 상황이 되어 아이를 깨우고 우리 부부는 전주역으로 이동하였다. 10여분 거리인 역을 30분 일찍 나가는 것을 보고 외할머님은 좀 더 쉬다가 가라며 떡과 과자를 싸주셨다. 잠깐 더 머무를까도 생각했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며 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전주역은 공사 중이었고, 역사까지는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안고, 아내는 아이의 이불이 담긴 캐리어를 담고 열심히 뛰어야 했고 출발까지 8분 남긴 시간이 되어서야 전주역 플랫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생각해 보니, 외할머니는 나이가 드시고 기억력이 떨어지셨지만, 나와 아이를 보는 따뜻한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할머니는 20년 전에 나를 위해 매일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말씀 주셨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지 알기에 아이에게도 이런 관계를 꼭 물려주고 싶다. 짧았지만 행복했던 외할머니 댁 방문은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다시 할머니 댁을 방문하여 이번보다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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