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 대한 나의 기억
1999년, 고등학교 2학년 영어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4월의 봄날, 창가에 앉아 수업을 듣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주 잠시 후에 누군가의 고함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키가 작고 땅땅한 체형을 지닌 영어 선생님은 제 앞에서 저를 노려 보고 계셨습니다.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잠시 졸았던 모양입니다.
"너는 벌써 7년 넘게 잤을텐데 그렇게 졸리냐?!"
수업 중에 졸았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는 와중에 선생님이 했던 그 얘기는 무척이나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살면서 보냈던 시간을 저렇게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실 뒷 편의 사물함 앞에서 엎드려 있으면서 저의 인생을 찬찬히 계량해 보았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17살이었으니 대충 14만 시간을 살았고 그 중 1/3을 잤다고 계산을 해보니 5.1년 남짓 되더라구요. 아마 영유아 시기 때는 더 많이 잤을테니 7년 넘게 잤을 거라는 선생님의 계산이 나름 정확했던거죠. 잠을 자는데 7년을 썼다면 밥을 먹는데는 얼마나 시간을 썼는지, 공부하는데 얼마나 시간을 썼는지, TV 보는데, 친구들과 축구하는데....그렇게 한참을 계산하다 아빠랑 함께 밥먹은 시간을 계산해 봤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늘 바쁘셨고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은 기억이 거의 나지 않더군요. 저의 아버지는 늘 밤늦게 들어오셨고, 주말에도 일이 많으셨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같이 밥을 먹었던 기억이었습니다. 어쩌면 한 번도 안 됐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17살까지 아버지랑 함께 밥 먹었던 시간을 계산하니 일주일에 1시간, 일년에 52시간, 17년 동안 884시간 정도였고 일수로 따졌을 때는 한 달 겨우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제 또래 친구들의 상당수는 저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뭐, 저희 아버지가 유독 바쁘셨을 수도 있구요.
17년 동안 밥을 함께 먹은 시간이 한 달 남짓이었으니 같이 대화를 나눈 시간도 거의 비슷했을 겁니다. 절대 6주 이상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날 이후로 24년이 지난 지금 다시 계산해봤을 때 함께 밥을 먹은 시간과 함께 대화를 나눈 시간의 총합이 아무리 잘 쳐줘도 6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더라구요.
이미 고령이 되신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졌고 저도 저의 가정이 생겨서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이 줄었어도 불편하지 않았던 그 사실은 제 아내의 품 안에서 제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참 불편해졌습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아빠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을 만들기 어려웠거든요.
저의 롤모델이 되어줄 저의 아버지는 일을 열심히 하셨고, 일 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분이셨습니다. 저의 짧은 생각 속에서 저의 아버지는 일>가족이었던 분이셨습니다. 이제 그 좋아하시는 일을 하실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신 아버지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제 스스로가 참 몰인정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함께했던 시간이 부족했던 만큼 아버지와 나 사이의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일까요? 여전히 불편하고 멀게 느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빠의 삶을 살게 될 제 모습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아버지도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 나의 할아버지 - 께서도 살아 생전 아버지와 거의 대화를 나누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며느리 - 나의 어머니 -와는 시시껄렁한 농담도 주고 받고 시덥지 않은 것들로 종종 다투기도 하셨던 분인데 아버지와 대화하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롤모델이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저도 아버지와 대화가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제 아내가 본가에 갔다 오면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왜 아버님이랑 이야기 안해?"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하죠. "원래 아빠랑 아들은 그런거야."
누가 그렇게 정했을까요? 아직 성별을 알 수 없지만 저의 아이가 아들이라면 전 아들과 대화하지 않는 게 맞는 걸까요?
제가 아빠로서 저의 역할에 고민하는 것처럼 저의 아버지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가족보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라고 단정지었지만 저의 아버지는 가정을 위해 몸을 갈아 넣으면서 일을 하셨던 분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전 아버지의 마음을 모릅니다. 물어본 적도 없고, 궁금한 적도 없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