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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이모 Jun 08. 2023

어린이집 친구를 만나러 가자

- 만나기 전이 힘든 연욱이.

1. 둘째 연욱이는 나를 많이 닮았다.

연욱이가 태어나자마자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오신 분은 시이모님이었는데(시어머니의 여동생), 연욱이를 안고 당신의 조카를 닮은 구석이 없는 사내아이를 보며 그저 웃으셨다.


겉모습만 닮은 줄 알고 약 5년을 키우고 나서 연욱이가 말을 제법 유창하게 구사하자, 그 머릿 속이 나를 더욱 닮아서 당황스럽기만 하다. 처음에는 다른 동거 어른들(시부모님과 남편)은 연욱이의 신기한 반응들을 보며 '누굴 닮은 거지?'하고 궁금해하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직관하지 못했던 나의 과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졸업앨범이 공개된 것보다 더욱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연욱이를 통해 어린 나와 대화를 나눈 경험을 나눠보려고 한다.


2. 연욱이의 어린이집 친구들을 만나는 약속이 잡혔다. 초등학교를 다니다보면, 생각보다 유치원 친구들과는 지속적으로 만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우리 집 첫째, 둘째 모두 어린이집 친구들과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연수의 친구는 서울에서 일산으로, 서울에서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겼음에도 여전히 만나고 있고, 연욱이의 친구들은 경기 광주시로 이사했음에도 만나고 있다. 


문득 어린이집 친구들과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본 결과 '어린이집은 엄마의 성향을 반영하는 장소'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초등학교는 거주지 위치에 따라 교육청이 배정해주는 것이지만, 어린이집은 부모의 선택에 따라 다니게 된다. '학교'라는 공간에 속하기 전에 아이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지에 따라 숲체험 어린이집, 영어 유치원 등 전혀 다른 보육기관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어린이집 친구들과 만나면 엄마들은 자연스레 유사한 육아관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고, 그 엄마로부터 길러진 아이들도 유사한 성향을 갖게 되어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다소 높아진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연욱이가 다닌 어린이집의 교육방식은 매우 특이했다. 어린이집과 가정이 어떤 노트를 주고 받는데, 그 노트에는 수시로 '아이가 했던 말'을 적는다. (그게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가 궁금하겠지만....) 연욱이가 7살 때 적었던 말은 아래와 같다.


돈이랑 실이랑 판사봉 잡고 싶어 

- 서연욱(7세)


연욱 : 할머니, 엄마가 돌잔치 안 했잖아요.

할머니 : 응, 안했지.

연욱 : 난 엄마가 돌잡이를 했다면, 실을 잡았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오래 살면 좋겠어, 엄마 얼굴 많이 보고 싶단 말야.

할머니 : 그래?

연욱 : 할머니, 난 판사봉 잡았는데 다시 돌잡이 하면, 돈이랑 실이랑 판사봉 잡고 싶어.


연욱이가 어린이집에서 선생님, 친구들과 주고받은 말을 읽어볼 때면, 집에서도 몇 페이지는 적어서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그러면 저절로 연욱이의 말에 귀기울이게 된다. 어린이집을 다닌지 약 3-4달이 지나자 연욱이도 스스로 재밌는 말이라고 여겨지면 노트를 가지고 와서 '방금 전에 내가 한 말 적어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어린이집만의 보육 방식을 환영한 학부형들만 7살까지 그곳에 아이들을 보냈다. 이 동네 초등학교에서 같은 영어유치원 출신들이 어울려 논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흔들림없이 그 어린이집을 보냈다.


위 글 말고도 연욱이의 말노트를 몇 개 소개해보자면,


평~생

-서연욱(6세)


엄마 : 연욱아, 평생이 무슨 뜻인지 알아?

연욱 : 한살부터 깨꼬닥 할 때까지, 하늘나라 갈 때까지!


엄마, 회사야?

-서연욱(6세)


(영상통화 중) 연욱 : 엄마, 회사야?

엄마 : 응, 회사야.

연욱 : 보여줘봐.

엄마 : (화장실에서 전화받으며 영상통화로 보여줌) 여기는 화장실이야,

연욱 : 화장실이 엄마 회사야?

엄마 : 아냐, 사무실에는 다른 분들이 계셔서 화장실에서 혼자 전화받는거야.

연욱 : 뒤에 누구 있는데?

엄마 : 아냐, 엄마가 거울에 비친거야.

연욱 : 어? 진짜네, 거울이었네.


연욱이의 절친은 재원이와 주안이 형이었다. 특히 재원이는 2년간 같은 반에서 종일 생활했는데, 연욱이는 재원이를 퍽 좋아했다. 재원이 엄마와 연락이 되서 처음 재원이네와 주말에 만났던 날이 생생하다. 나도 눈이 쳐진 강아지상으로 내세울만한 얼굴인데, 재원이 모자 앞에서는 쨉도 안됐다. 웃자마자 초승달 모양으로 바뀌는 눈하며, '나 착함'이라고 써 있는 표정하며- 연욱이가 매일 '재원이는 귀여워'라고 할 만 하다.


3. 초등학생이 되면서 재원이와 주안이 형은 경기 광주시로 이사를 갔다. 문득 징검다리 휴일을 맞아 안부를 묻던 엄마 셋은 2년 5개월 만에 한번 뭉쳐보자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 어느덧 초등학교 3, 4학년이 된 재원이와 주안이를 만나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연욱이가 내 옆에 오더니 문득 말을 꺼냈다.


"나, 내일 가기 싫어"

"...왜? 평소에도 재원이 보고 싶다고 몇 번 했잖아."

"... 변했으면 어떡해. 예전의 재원이가 아니면 어떡해. 그리고 나보고 변했다고 하면 어떡해."


그 생각의 회로가 나랑 같아서 숨이 턱 막혔다. 나도 모임 전날이 되면, 나를 좋게 생각하는 모임도, 친한 사람들과의 모임도, 처음 나가는 모임도, 학급 소풍도- 밀려오는 고민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를 좋게 생각하는 모임은 나에게 실망할까봐, 친한 사람들과의 모임은 누군가 변했을까봐, 처음 나가는 모임은 말실수 할까봐, 학급 소풍은 버스에 같이 앉을 사람이 없을까봐- 온갖 걱정이 들었다. 웃긴 것은 난 모임에서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학급에서는 임원이었고, 소풍날 제일 바빴다. 주변 누구에게도 '저는 모임 나오기 전에 매우 긴장을 합니다'라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다들 발랄하고 외향적인 성격이 부럽다고 했다. 그래서 늘 몰래 조용히 고민하곤 했는데, 여기 어린 내가 어른 나 옆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연욱아, 나도 걱정되네. 재원이도, 주안이도, 그들의 엄마들도 안 변했어야 하는데. 걱정되네"

"엄마도? 엄마도?"

"응, 근데 내일은 그냥 만나보자. 만나봐야 알지, 변했는지 안 변했는지- 걱정들이 무서워서 안 만나면 영원히 알 수가 없어."

"...만나봐야 아는거야?"

"그럼. 변했는지는 만나봐야만 알잖아. 변했으면 별 수 없지 모. 안 변했으면 재밌게 놀면 되잖아."

"...안 변했으면 좋겠어."

"응, 안 변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면서 자자."


요 녀석. 아까 친구들 만나기로 했다고 했을 때 애매한 표정을 지은 이유가 다 있었네.

이 머리통으로 그런 고민을 하려면 얼마나 머리가 아프겠노.

나만 고민하는것인가-하는 걱정이 더해져서 더 머리아프지 않게, 외롭지 않게- 여기 '어른 너'가 공감해주께. '괜찮아'라고 계속 이야기해줄께.


4. 토요일, 연욱이와 친구들은 저녁 내내 식당 옆 운동장을 뛰고 돌 쌓기를 하며 놀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렇게 신날 줄 알았으면 여벌 옷을 가져왔으련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땀이 식었으니 샤워를 안해도 된다, 왠지 내일도 뛰어놀 것 같으니 내일 샤워를 하는게 좋겠다' 등의 개똥철학을 늘어놓는 연욱이를 보며, 어제의 공감 결심은 온데간데 없고, 뭔가 속은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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