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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이모 Jun 10. 2023

엄마와의 새벽

연수는 늦게 잔다. 모-두 내 탓이다.

할머니가 '엄마는 늦게 오니 자자'고 하시면 연수는 눈을 감고 몰래 나를 기다린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내게 '언제와! 빨리와!'라고 문자를 보내면 난 오늘 일을 내일 새벽으로 미루고 일단 차를 탄다. 그래도 그녀는 양심이 있어서 '빨리와' 전법을 아무 때나 시전하지 않고 적절한 독촉 타이밍을 잘 노리는 편이다.


연수가 일전에 나를 다른 엄마들과 비교한 적이 있는데(우리 집에서 난 주로 비교를 당하는 편임), 장점으로 '빨리 자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를 꼽았다. 나도 양심이 있는 편이라서 연수에게 빨리자라고 할 수가 없다. 제법 기억이 생생한 초등학생 무렵부터는 가족 중 나만 깨어있는 새벽을 종종 보냈고, 학창시절에도 내내 올빼미의 삶을 이어갔기 때문이랄까. 새벽은 노래도 듣고, 이메일도 써야해서 매우 바빴다. 


물론 나의 엄마는 일찍 자야 키가 큰다며 제발 좀 일찍 자라고 하셨다. 난 엄마가 잘 때까지 자는 척을 하다가 몰래 일어났다. 그럼에도 난 우리 집에서 키가 제일 컸다. 난 "좀 덜 자도 키는 크려면 크는 것이며, 혹 덜 자서 키가 작다고 쳐도 그게 인생 사는데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생각했지만, 그걸 입밖으로 꺼내진 않은채 조용히 자는 척을 하다가 몰래 새벽 고양이가 되는 편을 택했다. 대신 매일 생각했다. '난 딸한테 일찍 자라고 안할테야-_-'.


야밤에 연수와 조우하면 그 때부터 수다를 떤다. 이 시간 때문에 연수는 부장님, 차장님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같은 부 막내부터 수석까지 이름을 모두 안다. 더불어 나는 연수의 학교, 학원 친구들을 모두 배우고, 수요일은 급식에서 특식이 나온다는 사실과 이번 주 수요일 급식 반찬이 무엇인지도 학습한다. 학교 길 건너 상가에 있는 떡볶이집에서 오늘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가 상승으로 사장님께서 가격을 조금 올려야 하는데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라 고민하신다는 이야기를 초등학생 딸에게 듣는다. 요새는 뉴진스의 신곡 뮤비 촬영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포착되었다는 점, 첫 팬미팅이 있었다는 점, 아이돌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최종에서 선발된 멤버들이 아이브, 르세라핌의 멤버가 된 것이라는 점 등을 알게 된다. 


밤에는 연수가 아주 약간 감성적이 된다. 그래서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엄마, 내가 나중에 시험 못 보면 못봤다고 안 혼낼거지?"

"시험 못 보면 넌 속상할 것 같아?"

"당연하지, 너무 속상할 것 같아.

"공부를 열심히 잘 해보고 싶어?"

"당연하지!"

"그럼 혼낼 일이 없겠는데?"

"...왜?"

"엄마가 혼내는 건, 니가 시험을 못봐서, 그래서 공부를 잘 하고 싶은데 잘 못하고, 좋은 어른으로 크지 못할까봐 속상하고 걱정되서 그런 거겠지? 근데 이미 니가 엄청 속상하고, 스스로 공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더더 속상할텐데, 난 그런 너를 위로해줘야지, 어떻게 제일 속상할 너를 혼내겠어."


이 대화를 나눈 다음에 흡족했던 그녀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무슨 맥락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연수는 나의 '실패담'을 즐겨 듣는다.


"오늘 버스타고 학원 다녀왔어?"

"응, 다녀왔어. 근데, 버스를 잘못탔을 때는 어떻게 해?"

"내려서 길을 건너서 비슷한 위치에 있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타면 돼"

"잘못 탄 적 있어?"

"응, 있어, 아주 대박 잘못 탄 적 있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 그 때 공부를 짱 많이 하고 중간고사를 봐서 내 자신이 쫌 멋졌어. 그래서 내 나름대로 옷을 차려입고, 지하철을 타고 오이도를 갔어. 외할머니랑 4호선을 몇 번 타봤는데, 마지막 정거장이 '오이도역'이었어. 그건 딱 봐도 바닷가 같더라구. 근데 이름이 오이도여서 너무 웃기지 않어? island of cucumber 같잖아. 아무튼 그 날 4호선을 타고 계속 가니까 오이도역이 진짜 나왔어."

"학원 안가? 학교 언제 끝났는데?"

"이게 시험기간의 장점이야. 시험 마지막 날엔 학원도 없고 학교도 일찍 끝나."

"진짜!?(이 와중에 함박웃음)"

"시험 '마지막 날' 하루만 오는 거야! 여하튼 오이도 역에 내리는데, 내 앞에 나랑 나이가 비슷한 학생이 가더라? 그래서 그냥 그 아이를 따라갔어. 자, 여기서 문제, 오이도 역에 바다를 보려고 서있는 학생이 많을까, 그 동네 사는 학생이 많을까?"

"바다보려고 온 건 엄마 뿐이었을거 같은데?"

"맞았어! 그 학생은 바다 정반대에 있는 시내로 가는 학생이었지. 그 학생을 따라 버스를 타고 1시간을 갔는데, 아무리 봐도 바다가 없었어. 그래서 내렸지. 그리고 길을 건너서 다시 탔어. 1시간을 왔더니 오이도 역이 다시 나왔지!"

"그냥 집에 왔어?"

"그러면 아깝잖아! 그래서 오이도 역 앞 붕어빵 아줌마에게 여쭤보았지. 바다가 어디인가요. 그랬더니 아줌마가 내가 갔던 방향의 반대방향을 가리키면서 '이쪽으로 가면 10분 후에 나와요' 하시더라구."

"그래서? 갔어?"

"아, 여기서 내가 오이도역을 왜 갔는지 이유를 하나 더 말해줘야겠다. 물상 선생님 때문인데..."

"물상이 뭐야?"

"아, 물리야, 물리, 과학. 물상 선생님이 방학 때 오이도에 가서 조개를 잡았다는 거야, 양파망으로 1망을 잡아서 그 앞에 조개집에 팔았더니 2만 원을 받았다는거야! 난 용돈을 벌고 싶었어."

"그래서 오이도를 갔다고?"

"응"

".... 그래서?"

"붕어빵 아주머니가 알려준 대로 버스를 타고 10분을 가서 오이도에 갔어, 그리고 바다를 보고 그 앞에 조개집에 들어가서 조개 칼국수를 사먹고 왔어"

"지도를 안보고 갔어?"

"그 땐 네비게이션이 없었다구"

"...엄마, 나 외할머니 편이 될 것 같아. 도대체 오이도를 왜 가는 거야?"

"외할머닌 몰라, 나 오이도 다녀온 거..."


-하필 집 옆에 4호선이 지나간다. 연수는 매번 오이도역을 가리키며 날 쳐다본다.



연수가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 어느 센치한 날, 내가 그 눈빛을 읽어낼 수 있을까. 

꼭 연수 몰래 미행과 경호를 해보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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