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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이모 Jun 20. 2023

치과에서 공상

지난 주, 왼쪽 마지막 어금니 반의 반 정도가 댕강 사라졌다.

자고 나니 사라졌다.

옆면만 사라진 것도 아니고 윗면도 깨작, 사라졌다.


범인은 회사였던 것으로 강하게 의심된다.

건건마다 만만찮은 고객님들 케이스를 받아들고 종일 고민을 했다. 샤워할 때도, 머리 드라이할 때도, 양치할 때도, 물 마실 때도. 그러다보니 잘 때도 일 고민을 했나보다.

일 고민이 많을 때는 자면서 이를 꽉 깨문다는 걸 최근 알게 되었다. 지난 주에 맨날 윗니의 공격을 받던 아래 어금니가 깨작, 사라졌다.

이렇게 아픈데가 생기면, 나이탓은 없고 무조건 회사 탓이다. 운동하면서는 부상없던 내가 회사 때문에 고장이 늘어나는 것 같다며 '이 길이 아니던가..'하는 직장인의 회한이 시작된다.


어금니 실종 다음날, 바로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5번이나 맞고 떼울 부분의 본을 떴다. 그렇게 마취가 세게 된 적은 처음이라 물을 마시다 흘려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오늘, 본을 붙이는 날이다.


마취제가 들어가자, 입술에 감각이 없어지고 혀의 반도 마비되어갔다.

그렇게 공상이 시작되었다.


(이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씽씽씽 치과기계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일어났던 공상입니다)


드라마 대장금에 보면 아직 나인(상궁 전의 직책인데, 갓 생각시를 지난 단계에 불과하다)인 장금이가 아버지같은 덕구 아저씨가 상감마마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누명을 쓰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직접 음식을 먹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중국의 귀한 육두구 기름을 약재로 드셨는데, 음식에 인삼이 가득 들어가면서 육두구의 긍정적 부정적 효능을 동시에 승하게 만들었고 이에 육두구의 부작용인 마비가 온 것이다. 이후 장금이가 한동안 미각이 안돌아오는데...딱 이 느낌이었을 것이다. 난 이제 맛을 느낄 수 없다. 코로나가 걸렸을 때도 미각을 잃지 않았는데 (아쉽게 입맛도 잃지 않았다, 아팠는데 야위지 않았다) 이렇게 어금니 치료와 함께 미각을 잃는 것인가.


미각을 잃으면 무슨 음식을 먹지. 씹는 느낌만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나. 씹는 느낌이 좋은 음식을 찾아 새롭게 음식취향을 정립해야 하는구나.

(마취끝났습니다. 이제 임시 메운 부분 뗄께요)


미각을 보존하기 위해 여기서 치료를 중단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비행기를 타면 안된다. 로빈슨크루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치과치료를 미루다가 무인도에 떨어질 경우 캐스트어웨이 톰행크스처럼 무서운 방법으로 이를 뽑아버릴지 모른다. 치과치료는 미뤄선 안된다.

(바람들어가요, 시릴 수 있어요-악!)


그리고 수영도 할 줄 알아야한다. 그래야 섬탈출을 꿈꿔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 수영을 배우는건 아주 좋은 일이다.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제 본 붙이는데 붙게 만드는게 굳기전까진 아플 수 있어요-으악! 살아남아야 한다. 일단 오늘 이 공간에서 먼저 살아남아야 한다.)


수영을 잘한다고 무인도를 탈출하는건 맞을까. 오늘 수영 중급레인을 처음 밟아보았는데 옆에 벽이 없이 레인과 레인 사이에 있다보니 양쪽에서 물이 튀겨오던데.. 바다는 그보다 더한 것 아닐까. 물속을 못보면 탈출에 지장이 있을지 모르니  늘 수경은 챙겨다니자, 선글라스는 없어도 수경은 챙겨다녀야겠네.

(이를 딱딱 부딪혀볼까요?)


어?내가 왜 수경을 챙겨다니는 고민을 하고 있지.

기억이 안나네.

(진료마쳤습니다)


씽씽씽 돌아가는 소리가 끝나자, 생각풍선이 펑 터지고,

왜 무엇을 생각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이 안난다.


남은 것이라곤 내일 회사가방에 수경을 넣자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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