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의 겨울, 부엌에서 김치를 담그다

배추 두 통이 건네준 향수 그리고 행복

by 낭만봉지 김봉석

낯선 바람이 부는 유럽의 길 위에서

우리는 가장 익숙한 그리움을 마주했다.

은퇴 이후의 삶은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더 소중히 바라보는 것이다.


장기간 유럽에서 생활하다 보니
현지 음식의 느끼함이
서서히 몸 안에 쌓여갔다.
아무리 맛있어도,
어느 순간부터는
달콤하고 매콤하고 시원한
김치가 간절해졌다.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겪게 되는
그 음식의 반란.


우리는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유럽으로 오기 전
몇 가지를 챙겨 왔다.
고춧가루와 다이소에서 구매한
3천원짜리 김치통.
그 외의 재료는
현지에서 조달하기로 했다.


밀가루, 소금, 설탕, 양파와 마늘은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배추와 젓갈이었다.
유럽의 첫 여행지였던 세르비아에서
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중국 마트에서
피시소스를 구했다.
젓갈의 빈자리를 대신해 줄
유일한 선택지였다.


계절 탓인지
배추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양배추로 김치를 담갔다.

한국에서는 늘 밥상 한켠에 있던
그 반찬이
이곳에서는
당당한 메인 요리가 되었다.


양배추김치는
느끼함을 달래주었고
부대찌개와 김치찌개의
기본 재료가 되어
우리의 힐링 음식이 되었다.


그러던 중
이번 여행지인 크로아티아에서
배추를 발견했다.
한국의 배추와 비교하면
썩 싱싱해 보이진 않았지만
우리 눈에는
유난히 때깔 고운 배추였다.
망설임 없이
두 통을 집어 들었다.


맛있는 김치를 만들고 싶었다.
언제 또 배추를 만날지 몰랐기에
남아 있던 고춧가루를
아낌없이 썼다.
이번만큼은
실패가 없어야 했다.


사실 우리는
한국에서도 요리를 즐기지 않았다.
김치는 늘
양가 부모님께 얻어먹는 음식이었다.
그런 우리가
유럽의 겨울 부엌에서
김장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배춧잎을 하나씩 떼어내고
깨끗이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소금을 뿌려가며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절여지는 두 시간 동안
김치 양념을 만들었다.


밀가루풀을 끓이고
마늘을 하나하나 까서
직접 으깨고 다졌다.
고춧가루와 파프리카 가루,
설탕과 피시소스를 넣고
마지막으로 다진 마늘을 더했다.
천천히, 정성스럽게 섞었다.


절여진 배추를 짜내고
양념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아내가
양념이 밴 배추 한 조각을
내 입에 넣어준다.
혀끝에서 시작된

단맛, 짠맛, 매콤함이
고속도로를 타듯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김치를 통에 담으며
이상하게도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돈이 아닌
시간과 정성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었다.


김장에 수육이 빠질 수 없기에
미리 사둔 고기를 꺼냈다.
목살이 없어
어깨살로 대신했지만
김치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어깨살 수육,
와인 한 잔,
그리고 김치.
고기는 조금 질겼지만
김치가 그 아쉬움을
조용히 감싸 안아 주었다.


난 행복이

더 많은 것을 얻고

계속 만들어 가야 하는

무언가라고 믿었다.


하지만 은퇴 후 삶은 달랐다.

지금의 행복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서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김치 한 통으로

하나의 행복을

조용히 쌓아 올렸다.


- 낭만봉지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의 김장. 힐링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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