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을 보면 우리가 보인다는 그 새삼스런 진리
때로는 우리의 일을 밖에 있는 외부자가 더 잘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안에 있는 우리는 우리의 각자의 위치에 따라 그동안 쌓아온 관념들이 다 다르고 각자의 이익도 달라 충돌하게 되죠.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 됩니다. 하지만 외부자는 그런 틀에서 자유롭게 없이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기반은 외국에 있지만 그 나라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객관적일 수 있는데 이 ‘일본의 굴레’는 그런 예에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서 이 책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객관적인 외부자 혹은 객관적인 거울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주관, 정치성향 등으로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복잡해서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사회문제들을 좀더 단순화해서 보여주는 거울 말입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일본의 여러 사회문제의 원인들은 일본을 좇아서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나라의 상황과 거의 90% 일치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는 서구인이라는 저자의 위치, 두 번째는 분석대상인 일본사회란 두 단계의 여과를 통해 오히려 더 객관적으로 우리 사회문제를 간단히 설명하는 역할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가지만 얘기해보죠. 일단 저한테는 일본국민들이 왜 자신들의 과거, 특히나 다른 나라에 피해를 준 2차 대전의 역사를 뒤돌아보지 않는 집단의식에 사로잡혔는지 설명한 이 책의 내용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근원적으로 2차대전 종전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이 직접 일본을 통치하는 대신 다시 기존의 정치세력과 관료제를 되살려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택하다보니 2차대전에 책임있는 세력들이 다시 돌아왔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 국민들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교육하고 선전하게 됐다는 겁니다. 특히나 미군정은 천황이 없어지면 일본사회가 붕괴될 것이라고 오해해 천황제를 유지하게 했고 그러다보니 전범재판 등에서 바로 천황의 책임이 제기되지 않게 덮어버렸다는 설명입니다. 이런 선택을 하게한 이유는 또 있는데 바로 전후에 1946년에 선거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득세하자 미군정의 공포는 바로 기존 우익을 살려내는 것으로 갔다는 겁니다.
자 어떻습니까? 해방직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과 매우 유사합니다. 미군정과 친일세력으로 등치시키면 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또 일본 관료와 정치세력이 전후 일본경제의 틀을 만든 것도 들여다봅니다. 미군정이 재벌을 해체한 후 대신 대기업의 통제권을 쥔 건 관료들이었습니다. 기업들은 경제부처의 관료기구처럼 변형됐고 혁신관료들의 지시대로 경영활동을 하고 심지어 관료들이 기업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들에겐 다행스럽게도(?) 한국에서 터진 6.25전쟁은 경제재건의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자민당 정치세력은 관료가 경제를 통제하고 일본이 계속 미국의 방어체제 일부로 편입된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눈가림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겁니다. 도시의 기업들은 관료들에 의해 통제됐고 관료들은 또 농촌지역에 계속 보조금을 주면서 농촌이 자민당의 표밭이 되도록 관리합니다. 관료들은 자민당의 표밭이 유지되게 경제적으로 돕고 자민당의원들은 관료들의 정책을 법으로 뒷받침해주는 공생관계, 이른바 1955년 체제라는 관료-자민당의 연합체제가 완성됩니다.
이 일본 정치체제는 우리와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지만 박정희시대의 계획경제와 공화당 체제를 연상시키는 면도 상당히 존재합니다.
일본의 저출산에 대한 설명도 아주 우리나라에 시사점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사회를 움직인 관료집단은 국방과 외교는 미국에 종속된 채로 경제발전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고도성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부가가치가 무궁한 수출에 집중하는데 다른 선진국과 경쟁하며 경쟁력있는 수출산업을 일으킬 자본을 얻기 위해서 일본국민들의 저축을 강요합니다. 전국민에게 주택대출은 어렵게 하고 저축만 집중권장하고 저임금으로 무급 초과근무를 전사회적 문화로 만듭니다. 대신 회사에만 들어가면 평생고용하는 것으로 불만을 없게 하고 수십 년 샐러리맨을 하면 성냥갑만한 아파트를 마침내 갖게되는 평균적인 삶의 서사를 만들어내죠. 거의 모든 일본 남성의 인생서사가 되는데 여기서 또하나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역할입니다. 남성들이 가정은 주말에만 한두 시간 신경써도 되게끔 여성들은 육아와 가사, 그리고 시부모 봉양을 전념하게끔 하는 사회문화를 만든 거죠.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국가가 ‘올가미’를 씌운 겁니다.
그런데 사정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결혼해 퇴사하기 전까지 남성보다 적은 월급을 받으며 그래서 돈이 없어 부모님과 같이 살던 일본여성들도 대졸자들이 늘면서 점점 임금이 올라가고 특히나 일본에 들어와 있던 외국기업들이 상대적으로 고학력 저임금인 일본여성들을 대거 고용하면서 일본 여성들의 경제력이 또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여성들은 꼭 결혼해 남성의 경제력에 기댈 필요없이 결혼 않고 삶으로써 굴레를 피할 길을 찾거나 혹은 결혼해서도 자녀를 갖기 않음으로써 남편이나 부인이 같이 ‘가난한 중산층’ 올가미를 피할 길을 찾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역시 우리나라의 저출산 원인을 설명하는 것으로 바꿔도 거의 90퍼센트 유효합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사회학자가 아니고 투자은행에서도 다년간 근무한 경제전문가입니다. 이 책에서도 일본 경제와 기업의 흥망성쇠, 그리고 앤캐리 등 국제경제에서 일본 엔화의 위상에 대한 설명이 가장 전문적이고 명쾌하긴 합니다. 하지만 사회문화적 설명은 우리나라의 너무 적절히 들어맞는 점에서 저 같은 일반독자들에겐 새삼스럽게 시각을 깨우쳐 주더군요. 앞에 예를 든 저출산 문제 등 외에도 왜 일본의 20대 남성들이 좌절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은 물론 여성에 대한 반감을 키우게 됐는지 설명한 부분도 너무나 우리에게 딱 들어맞더군요. 또 좁은 국토의 나라전체를 한번에 파국에 몰아넣을 수 있는 에너지체제 즉 원자력에 의존하다가 나라 전체가 없어질 뻔 했던 동일본대지진 때의 난맥상, 게다가 그런 일을 겪고도 내놓은 해답이 원전규모를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참 와 닿습니다. 물론 남조선일보에서 이 책을 쓴다면 이 부분은 절대 다루지 않을 것이란 것에 5천원은 걸 수 있습니다만...
어쨌건 이책은 일독을 권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