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였는지 동기였는지 후배였는지 누군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화 중 누군가가 툭 내뱉은 이 말은 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새로운 길을 이야기해 주는 것과 같았다. 답을 모르던 주관식 문제에서 그나마 찍을 수 있는 객관식 문제로 바뀐 느낌이랄까.
이미 복수전공, 부전공의 신청기간은 지난 상태라 그냥 무대뽀로 토목학과 수업을 신청해서 듣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토목은 시공과 설계분야가 있었고, 설계라면 오래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캐드수업을 시작으로 토목학과의 수업으로 남은 학점을 채우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졸업학점을 채우면 4학년때는 취업준비를 하며 최소한의 수업만 듣는 편이었지만 이왕 듣기로 한 거, 등록금도 내는데 하며 졸업학기까지 들을 수 있는 수업을 꽉꽉 채워 들었다.
캐드, 응용역학, 토목지질학, 측량 등등.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것이 있었다. 토목학과도 공대라는 사실, 그리고 공대엔 여자가 적다는 사실도. 앞서 말했듯이 나는 수학과 물리를 정말 싫어했다. 1학년때 교양필수로 들어야 했던 대학물리학과 미적분학조차 듣는 내내 고생했었는데 그 사실을 완전히 망각해 버린 것이다. 처음 응용역학 수업 때 교수님이 말씀하신 교재를 사고 펼쳐본 나는 수강취소까지도 고민했다. 얇은 습자지와 같은 종이에 깨알 같은 글자로 써져 있던 공식과 설명들. 이걸 공부하려면 정말 엄청난 시간이 들겠구나 싶었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이야기한다면, 3학년때부터 랩실을 선택하여 졸업논문을 써야 했던 우리 과의 특성상 학부생임에도 학생별로 지도교수님이 있었다. 내 지도교수님은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의 교수님이었고, 학문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히 높은 분이었다. 전공수업을 열심히 공부해도 모자랄 판에 랩실에서 당당하게 재료역학책을 펴놓고 공부하던 나는 교수님껜 밉상이었을 것이다. 결국, 교수님은 나에게 "지질학과의 이단아"라는 말을 하셨다. 물론 농담 섞인 말투로 이야기하셨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적잖이 놀란 것 같다. 지질학과의 이단아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냥 쭉 이단아로 지내야겠단 생각에 필수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학점은 토목과 수업을 듣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공대에는 여자가 없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 사람이 없었다. 모든 수업에서 언제나 홍일점으로 주목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모든 학생이 남자였다. 타과생에 홍일점. 강의실을 들어가면 항상 시선을 받곤 했다. 이게 회사로까지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렇게 학과의 이단아는 졸업학점을 꽉꽉 채우다 못해 초과를 하면서 무사히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선택도 취업사이트를 보면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졸업하던 해, 그해에는 토목업이 하향세로 접어들고 있던 시기였다. 4대강 사업이 끝난 뒤 토목업, 건설업 쪽으로 일이 많이 줄었으며 회사의 사정들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 결과 신입사원을 뽑는 회사들이 급격히 줄었던 것이다. 대기업과 공기업을 갈 실력은 되지 않아 중소기업으로 입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기회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래도 한 군데 내가 일할 곳은 있겠지,라는 생각에 열심히 이력서를 넣고 연락이 오면 부지런히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렇게 한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면접관이 내가 토목과 수업을 들은 것을 보고 이 친구는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합격을 시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