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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ndon Mum Jul 16. 2021

[BOOK]먹고, 읽고, 사랑하라

기분따라 북 큐레이션 by 리딩리딩

초당옥수수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냄비에 물을 가득 채워 옥수수를 푹푹 삶았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냄비 주변으로 증기가 차오르는데도 이상하게 여름날 시원한 냄새가 납니다.

어렴풋이 기억 납니다. 커다란 냄비에 쪄낸 옥수수를 소쿠리에 소담스럽게 담아 가지런히 들고 오던 손.

바로 외할머니집 나무 아래 평상에서 보낸 여름방학의 모습입니다. 샛노란 옥수수 알알이 추억이 맺혀있습니다.  그 추억이 또렷한 이유는 옥수수에 이런저런 맛이 덧붙지 않아서, 오직 외할머니의 사랑만이 묻어있기 때문일겁니다.

때로는 화려한 정찬보다, 소박하게 담긴 옥수수 하나에 머릿 속까지 청량해지며 포만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좋은 책과 좋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리딩리딩이

집밥과 할머니의 반찬이 그리운 이들에게 추천하는 큐레이션.


**책 제목을 클릭하면 '리딩리딩' 큐레이션 서평으로 연결됩니다








경양식 집에서(조영권 지음, 린틴틴)





힘이 쭉 빠지는 날이 있습니다. 대단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상의 조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버린 날. 이깟 일에 넘어진 내가 한심해서 더 울적한 날. 바닥에 뻗은 채로 ‘아아, 나는 구제불능이야’ 자책하는 날.


의기소침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현실로부터 내 정신을 쏙 빼놓을 새로운 책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맛있는 음식! 혀끝의 쾌락에 집중해보자. 달고 짜고 새콤해서 벌떡 일어나게 될 마법 같은 요리를 생각해 내야 해! 신간 코너에서 이 울긋불긋한 책을 발견한 건 딱 그런 날이었습니다.


작가는 28년차 피아노 조율사입니다. 조율 의뢰가 오면 낡은 공구 가방을 들고 전국 어디든 갑니다. 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탑니다. 피아노 소리를 잡고 꺼내드는 건 작은 수첩, 거기에는 <몽마르뜨> <마로니에> <라임하우스> 같은 이국적인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그만의 맛집 리스트입니다. 그리고 공구가방을 챙겨들고 떠납니다. 경양식 집으로!

“나는 돼지고기 등심을 두드려 편 후 달걀과 빵가루를 입혀 튀긴 한국식 돈까스를 두툼한 고기로 만드는 일본식 돈까스보다 더 좋아한다. (중략) 적당히 두드린 부드러움과 바삭함이 어우러지는 우리 돈까스가 더 균형 있는 음식이라 생각한다.” (128p)





경양식의 ‘가벼움’은 그런 게 아닐까요. 수프 그릇을 어느 쪽으로 기울이든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것. 한 손에 포크를 쥐고 다른 손으로 소주를 털어 넣든, 깍두기를 공략하든, 즐겁고 맛있으면 훌륭한 식사라는 것.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비싼 돈을 내고도 주눅이 듭니다. 메뉴 이름 하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서 분에 넘치는 접대를 받고는 돌아와 소화제를 찾기 마련. 반면 몇천 원짜리 돈가스 한 그릇에 샐러드와 쌀밥, 감자튀김을 꾹꾹 채워 담고 수프와 후식까지 구색을 갖춰주려는 정성, 경양식집의 촌스러운 서비스에는 진심으로 감동하게 됩니다.


일상은 대개 무미건조하지만 가끔 '단짠단짠'도 있습니다. 돈가스 소스의 맛과 같은 것, '간단한 서양식 일품요리' 경양식, 인생처럼 우습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요리를 맞보면 삶의 가장 단순한 기쁨이 찾아올겁니다.



음식의 위로(에밀리 넌 지음, 마음산책)



정신을 차려보니 인생이 밑바닥까지 내려와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남자, 그리고 그가 데리고 온 밝고 명랑한 딸. 시카고 한복판에 자리 잡은 따뜻하고 편안한 집. 하지만 불행이란 언제나 불친절하듯, 갑작스레 찾아온 오빠의 자살로 일상의 모든 안락함이 헝클어집니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은 이미 얼어붙은 우리 마음속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얄팍하고 아슬아슬한 부분을 쿵! 하고 내리칩니다. 그럴 때면 한없이 나약해진 우리 자아는 구해줄 사람도, 하소연할 이도 없는 차갑고 어두운 심연으로 추락해버리고 맙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페이스북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글을 올리고 다음날 아침 시니컬한 댓글들로 호되게 혼이 나겠거니 생각하지만 그 밑에 달린 댓글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습니다.


“어서 이리와. 우리가 요리를 해 줄게!”

 저자는 ‘뉴요커’지 등에서 10여 년 간 편집자로 일하며 음식과 레스토랑 관련 기사를 담당했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맛보고, 그걸 쓰는 일에 종사하는 그의 지인들의 댓글이 이어지며 자연스레 ‘위로 음식 투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그가 지금껏 써오고 맛본 음식들이 그를 위로할 차례가 된 겁니다.






어두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던 고향, 친척집, 친구 집 등을 차례로 방문하며 그는 어릴 때 먹던 음식과 함께 상처받은 기억 따뜻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돌이켜보면  ‘음식’과 인생을 다룬 많은 영화와 책들 역시 그랬습니다.  ‘아메리칸 셰프’나 ‘리틀 포레스트’는 어떤가요. 주인공들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어넣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며, 절망에 빠진 인생을 구원한 것은 와인 마리아주를 곁들인 미슐랭 레스토랑의 정찬이 아니라 쿠바식 샌드위치나 배추전, 오이 콩국수 같이 지극히 평범한 음식들입니다. 정성을 예찬할 수 있는 맛, 그 소소함으로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초대하고 초대받을 수 있는 식탁은 누구에게나 위로가 될 테니까요.


이 ‘위로 음식 투어’의 마지막 종착지가 궁금하다면 책장을 펼쳐보길 권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책을 덮을 때 따뜻한 한 끼가 필요한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리기를 소망합니다. 모두에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잘 차려진 한 상이 절실한 지금,  무엇보다 그 상 위로 오갈 위로와 배려, 사랑의 말들이 필요한 시기이니까요.


 나는 다행스럽게도 인생이 연회가 아니라 포틀럭 파티임을 깨달았다.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도 환영받는 파티. 각자 지닌 것을 마음 편하게 들고 오는 곳. 너무 피곤하거나 돈이 모자라면 핫도그를 가져와도 좋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정성을 듬뿍 담은 음식을 가져와도 되며 많은 양의 음식을 가져온 사람도 편의점 콩 샐러드 하나 들고 온 사람과 나눠 먹을 수 있는 파티. 사람들은 언제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것만 기억하면 된다. p.360.



식탁과 화해하기(루비 탄도 지음, 민음사)



근래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맛이 좋았다면 믿으시겠어요? 단호한 어조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 책, 유머가 가득 든 책, 그러면서 굳어버린 뒤통수를 슬그머니 때려주는 책.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위트가 소금 후추처럼 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생각거리들을 툭툭 던져줍니다.


이 책에는 진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저자는 지적이면서도 장난꾸러기 같은 사랑스러운 언어로 우리가 음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유쾌하게 펼쳐 보여줍니다. 양파 껍질 까듯 하나씩 드러내는 이야기에는 톡 쏘는 매운맛이 돕니다. 사회에 만연한 웰빙 숭배와 다이어트 문화를 산뜻하게 저격하고, 음식의 양극화 현상을 걱정스럽게 바라봅니다. 침이 고이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가득하지만 사람을 홀리는 푸드 포르노도, 아는 척 고상한 척하는 미식(美食) 세계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진솔하고 거침없고 때로는 발칙한 음식 이야기에 덧붙여 독자들의 냉장고와 팬트리를 영리하게 비울 수 있는 소박하고 참신한 레시피들까지 알려줍니다. (하필 영국 가정에 있는 냉장고와 팬트리라는 점이 좀 아쉽기는 해도 저자가 영국 사람인 걸 어쩌겠어요)


저자인 루비 탄도(Ruby Tandoh)는 철학과 예술사를 공부했고 2013년 영국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 ‘그레이트 브리티시 베이크 오프(The Great British Bake Off)’ 최종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지금은 영국을 대표하는 제빵사이자 음식 칼럼니스트,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독학으로 요리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이 책이 강조하는건 한마디로 건강하고 긍정적인 식문화힙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복잡하고 생각할 게 많은 영역이기 때문이죠.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단계마다, 한 입 한 입 씹을 때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윤리적 딜레마로 가득 차 있다.” 오늘 저녁에 뭘 먹을까 하는 단순한 질문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뢰밭으로 변해 버린 이 세상에서, 그녀는 음식을 먹는 단 하나의 옳은 방법 따위는 없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들려주는 초콜릿과 그레이엄 크래커에 얽힌 전복적인 역사를 듣다 보면, 음식에 들러붙는 가치라든가 의미 같은 것은 시대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라는 담백한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레시피에는 편견이 없습니다. 꼭 유기농 마트에서 가장 신선한 최상급의 토마토를 가져와서 쓰라고 하지 않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토마토 통조림을 주저 없이 담백하게 재료로 사용합니다. 구하기 힘든 재료와 화려한 조리법으로 기 죽이지 않고, 그저 평범하고 저렴한 재료로도 어떻게 하면 영양가 있고 따듯하며 마음에 위안이 되는 수프를 만들 수 있을지를 소개합니다. 인스타라는 찬란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더욱 극명하게 보이는 음식의 양극화 현상, 즉 음식을 먹는 일에 보란 듯이 계급적 질서를 담는 일에 그녀는 차분하고 따뜻하게 반대합니다.



음식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항상 행복하고 근사한 이야기일 수만은 없습니다. 아무리 고차원적인 이상을 우아하게 논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배고프고 허기진 영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음식 이야기는 너무 윤색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음식이 주는 기쁨과 행복도, 그 이면의 어두움과 불편함도 고르게 담아냅니다.


먹는 일 하나만 차분히 들여다보는 걸로도 우리는 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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