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따라 북 큐레이션 by 리딩리딩
기억하세요?
몇해 전 까지만해도 우리에겐 '해외 여행'이란 탈출구가 있었다는 사실.
시험과 레포트가 이어져도, 매일 야근에 찌들어도 결제해 둔 비행기표 한장만 있으면
마음은 얼마든지 여기서 저 멀리로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었는데 말이죠.
점점 더 가팔라지는 코로나19 확진자 숫자, 기약할 수 없는 돌파구에 답답한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면
올 여름은 시원한 집 안에서 책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좋은 책과 좋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리딩리딩이
훌쩍 떠나고 싶은 당신에게 추천하는 큐레이션.
**책 제목을 클릭하면 '리딩리딩' 큐레이션 서평으로 연결됩니다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무엇이든 집 안에서 소비할 수 있는 시대라지만, 책을 들고 볕 좋은 구석을 찾아 기웃거리던 시간이 있었죠. 창 밖 사람들을 보며 라디오 음악에 집중할 때 우리는 묘한 행복감을 느끼곤 했어요. 그중 단연 최고의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예정'으로 카페 입구에 섰을 때!
별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카페를 찾는 것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매한가지지만, 작가는 그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입체적이고 묵직하게 풀어냅니다.
"바다는 등 뒤에, 커피는 내 앞에 있다. 내가 안을 수 없는 것을 뒤에 두고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을 앞에 두고 살면 그만이다. 나는 그곳에 앉아 돌아갈 수 없는 바다를 뒤로, 더 뒤로 보냈다."
카페란 그런 곳입니다. 혼자이기도 싶고, 함께이기도 싶은 욕망이 뒤섞인 '따로 또 같이'의 공간. 사람들은 카페에서 그렇게 서로 다른 욕망을 채우며 적지 않은 위안을 얻습니다. 카페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파리와 리스본, 비엔나의 어느 노천 카페를 잊지 못하는 여러분들을 위한 책입니다.
<체공녀 강주룡>의 작가 박서련이 썼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정보도 없이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도전하는 주인공 셜리가 인도네시아 발리를 출발해 멜버른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성장소설을 예상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연애소설이라니! 주인공이 자기다운 삶을 찾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역시 그동안 만났던 많은 이들과 우정과 사랑 덕분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호주 멜버른이 배경이라 호주에서 시간을 보내신 분들에게는 추억을 새록새록 되새길만한 소설입니다.
“여러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은 그 문화적 배경에서보다 그들을 사랑해주는 사람들 안에서 정체성을 찾게 된다. (...)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가 된다.” (199p)
전대미문의 전염병으로 여행은 커녕 독방에 수감된 죄수처럼 집 안에 갇혀 재택근무를 하는 일상. 이럴 때 책으로 떠나는 모스크바 여행은 어떤가요?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반평생을 호텔에 갇혀 산 백작입니다.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넓은 영지도,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웃음소리도 사라진 9㎡ 남짓한 호텔의 좁은 창고에서 사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러시아를 집어삼킨 볼셰비키 이념이든, 육안으로 확인 할 수조차 없는 바이러스든, 우리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절망과 몰락, 치욕의 상황에서도 로스토프가 선택한 것은 품위와 우아함, 그리고 웃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 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687p.
우리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한 건물에서 보낸 그는 어떻게 존엄을 지켰을까요. 700페이지에 이르는 이 '벽돌책'을 읽는 것, 지금은로스토프가 살던 모스크바로 떠나기 더 없이 좋은 시간입니다.
니시카와 감독은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제자입니다. 책은 그녀가 영화를 찍으며, 시나리오를 쓰며, 다양한 스태프와 배우들을 만나며 ‘관계’한 것들(저자는 이를 X라고 부른다)에 대해 풀어냅니다. ‘죽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둡지 않냐고요? 오히려 경쾌하고, 때론 숨 찰 정도로 힘찹니다. ‘상실’이란 어둠이 도처에 있으니, 우리 최선을 다해 밝아져 볼까요? 라고 독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너무 무겁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아서 하나하나 밑줄을 그어 기억하고 싶으니 지금같은 시절에 정말로 딱 맞는 책입니다.
"사랑이란 관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방면으로 얽혀서 부담도 주고, 나도 변하고 상대고 변하고, 함께 아직 가본 적 없는 곳을 여행하는 일이다. 관계할 수 없는 사람을 멀리서 남모르게 사모하는 사랑은 내게는 어렵다." (X=사랑)
"그 한없이 손이 많이 가는 일희일비가 있었기에 우리는 ‘내가 여기 있어 줘야만 한다. 아니 있어도 좋다’고 날마다 생각할 수 있었다. 인간은 의외로 자기 혼자 끙끙거리며 생각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X=주연)
"내가 이제껏 멀리 떨어진 가족에게 돌아가 글을 써온 이유도, 하루에 몇 번쯤 부모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거나 부부 싸움을 구경하는 것이 내가 홀로 걷는 길을 비추는 작은 빛이 되어줬기 때문이다."(X=작업하는 장소)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에요. "어쩌면 밤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내일은 없을 수 있으니까, 관계를 회복시킬 기회 따위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게 뭐든 그대로 맥없이 손에서 떨어트리지는 말자"라고. 상실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못 할 게 없습니다. 언젠가 모두 소멸할 거니까, 그때를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끝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알기에 우린 뭐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밥을 먹고, 싸우고, 웃고, 울고. 때론 고독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