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비

행복순간 포착

by 봉림숲

입동이 하루 지난 이른 새벽부터 비가 내립니다. 11월에 내리는 비는 가을비라고 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고 겨울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 거 같습니다. 나뭇가지에 남은 잎보다 땅에 쌓인 낙엽이 더 많지만, 여전히 남은 나뭇잎들은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있으니 가을비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협을 좀 한다면 늦가을비라고 하면 대충 맞아떨어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또 세월을 보내는 입장에서는 손해를 덜 보는 거 같기도 합니다.


늦가을비가 다른 계절에 내리는 비보다 더 무겁다고 느끼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봄과 여름처럼 따뜻한 계절, 구름 잔뜩 낀 날에 내리는 비는 시원하고 가볍습니다. 겨울비는 낮은 기온 자체가 주는 무게감이 있어서 그런지 추운 날씨에 비가 좀 내린다고 해서 더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늦가을에 내리는 비가 다른 계절보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계절의 변화 가운데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가 지나가고 나면 나무들은 잎들을 거의 털어내고 물을 내려 거무튀튀한 기둥과 줄기만 남긴 채 북서풍에 대비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웬만한 더위나 태풍에도 견뎌내던 나뭇잎이지만 늦가을에는 비 한 방울의 힘도 버티지 못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집니다. 해 떨어진 놀이터에서 더 놀겠다고 보채는 아이들을 혼내어 집에 데려가는 부모처럼 겨울로 들어서는 관문에서 내리는 가을비는 속 깊은 단호함이 있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은 아직 밤이 머물고 있습니다. 평일에 그렇게도 꿈꾸던 늦잠 자기 딱 좋은 날이지만 몸은 벌써 일어나 거실로 향합니다. 출근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기 때문에 몸이 피곤하다는 생각은 편견이나 변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 평일에는 자유가 제한된 공간에서 버거운 일들을 감당할 하루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에 더 피곤하게 느끼는 거 같습니다. 자연온천수가 나오는 온천장 가까이에 이사 온 후로는 매주 주말이면 온천욕을 하게 됩니다. 지역주민 할인이 있어서 일반 대중탕보다 가격이 더 저렴한 데다 수질과 시설은 매우 좋으니 굳이 안 갈 이유가 없겠지요.


온천장 길을 운전하며 오늘은 라디오도 유튜브도 모두 껐습니다. 유리창에 터뜨리는 빗방울 소리, 유리창에 퍼질러 앉은 비를 낑낑거리며 밀어내는 낡은 윈도브러시 소리, 살짝 열어놓은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자동차 바퀴에서 올라오는 빗물의 파편들이 터져나가는 소리 그리고 곧 사라질 울긋불긋한 가을 풍경을 스쳐 지나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지요.


몇 주 전 이 도로 위 맞은편 차선에서 로드킬 당한 아기 고양이를 보았습니다. 어미 고양이가 없는 틈을 타서 혼자 나와 길을 건너다가 변을 당한 거 같았습니다. 아니면 엄마 찾아 나서다가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요. 차에 치여 얼마 되지 않아 젖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죽어가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갑작스럽게 도로로 뛰어드는 짐승을 피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운전에 집중해서 나로 인해 다른 생명체들의 가을을 앗아가는 죄는 짓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단풍이 물들어 가는 나뭇잎과 가을 열매들은 더 이상 늦가을비를 빨아들일 수 없습니다. 없다기보다는 빨아들일 이유가 없어진 거지요. 잎은 자기 역할을 다했고 모과, 감, 사과와 같은 가을 열매들은 각자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늦가을비 내리는 도로를 달리며 한해를 잘 살고 사라지는 가을 단풍잎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버티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나에게도 늦비 내리는 인생의 가을날에 아름답게 서 있기를 바라봅니다.



가을 단풍잎


봉림숲


이제는

이별의 시간

새싹으로 돋아나

송충이에게 먹힐 뻔했던 봄

목마름을 잘 견딘

긴 가뭄

타지 않고 살아냈던

뜨거운 여름

남은 영양분 다 내어주기까지

삼천만 초를 살아온

늦가을 단풍잎

야윈 몸은 꽃이 되어

일생에 가장 예쁜 오색수의 단장을 하고

나무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낙화!


단풍잎은

타는 햇볕에 못 견뎌 떨어지는 게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옹졸하기 짝이 없는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