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7. 그림에 인생을 담은 화가들
시간이 나면 전시회에 가거나 좋아하는 화가의 도록을 구매하기도 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미술을 즐기는 편이다. 좋아하는 화가의 생애를 다룬 전기영화가 나오면 챙겨 보기도 한다. 오늘 소개할 영화의 두 주인공은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어 팬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에는 삶의 굴곡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따뜻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캐나다의 나이브 아트 화가 ‘모드 루이스’의 삶을 다룬 <내 사랑>과 독특한 고양이 그림으로 알려진 영국 화가 ‘루이스 웨인’의 전기영화 <루이스 웨인: 고양이를 그린 화가> 두 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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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Maudie)>, 에이슬링 월시, 2017
<내 사랑>은 따뜻한 시선으로 동화 같은 그림을 남긴 캐나다 화가 모드 루이스의 일생을 담은 전기영화다. 작고 아담한 집에서 소박하지만 단단하게 꿈을 키워나간 모드와 그녀의 남편 에버렛의 이야기를 그녀의 그림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영상에 담아냈다. 두 사람의 사연은 영화화되기 전 책, 연극, 짧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바 있는데 영화는 아일랜드 출신 감독 에이슬리 월시가 연출을 맡았고, 어떤 역할도 본인의 색으로 재창조해내는 배우 샐리 호킨스가 모드를 연기했다. 두 사람은 박찬욱 감독 <아가씨>의 원작인 영국 드라마 <핑거스미스>에서 호흡을 맞춘 후 <내 사랑>을 통해 오랜만에 재회했다고. 열연을 펼친 샐리 호킨스는 제52회 전미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영화가 입소문을 타고 흥행하며 3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천만 관객 영화가 많은 한국에서 33 만 관객은 너무 소박한 것 아닌가 싶지만 외화 관람 비중이 적은 편임을 감안하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모드와 에버렛의 이야기도 울림을 주지만 아름다운 영상미도 돋보이는데 감독이 영화를 준비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하니 영화의 모든 장면이 그림 같았던 건 당연한 결과라 납득하게 된다.
영화는 모드가 에버렛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어가기까지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전기영화로서 모드에게 중심이 맞춰져 있지만 동시에 모드와 에버렛 두 사람의 감정과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가는지도 세심하게 그려냈다. 특히 고아로 자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고생하며 살아온 무뚝뚝한 에버렛이 모드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과 미묘한 심리 변화를 에단 호크가 굉장히 잘 표현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잘 우는 관객에 속하는데 영화 마지막에 모드를 떠나보내는 에버렛의 먹먹한 감정을 연기한 에단 호크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많은 이들이 에단 호크의 인생 멜로로 <비포 시리즈>를 꼽지만 나는 에단 호크의 인생 멜로는 <내 사랑>에 한 표!
사람의 성향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면 ‘낙관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에버렛은 후자, 모드는 전자로 양극단에 놓여있는 두 사람이 만나 마침내 변화를 이뤄낸 건 모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던 밝고 쾌활한 모드가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고 꽁꽁 얼어있던 에버렛의 마음을 서서히 녹였으니까. 김중혁 작가님은 영화를 보고 “사랑은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을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보면 좋은 영화”라는 평을 남겼는데 모드와 에버렛의 만남과 두 사람의 함께 한 삶의 여정이 ‘우리의 것을 만드는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영화다.
마리's Clip
“붓 한 자루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요. 창문, 창문을 좋아해요. 지나가는 새. 꿀벌. 매번 달라요.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바로 저기.” – 모드 루이스
처음 모드의 그림을 알아보고 그녀의 작품을 세상 밖으로 꺼내 준 산드라가 오래도록 알고 지냈지만 모드의 창작열의 원천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질문에 대한 모드의 답변. 장애를 안고 태어났고, 부모님을 연달아 잃고, 남은 혈육에게서 버려지고, 무뚝뚝하고 차가운 남편까지. 모드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자갈을 걷어내고 꽃을 심고 피워낸 건 오로지 모드 자신으로 자신이 피워낸 행복의 꽃을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눠준 화가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소확행을 찾는 것보다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어려운 사람으로서 힘든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낸 모드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 한 마디라 생각한다. <내 사랑>은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참 많은 영화인데 연말을 맞아 뼈아픈 자기반성을 하게 해 준 대사라 고심 끝에 선택했다.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윌 샤프, 2022
영화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는 올 2월 개봉한 루이스 웨인의 전기 영화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됐다. 연출 맡은 윌 샤프 감독은 배우로도 활동 중인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린 BBC 드라마 <셜록>에서 짧게 호흡을 맞춘 바 있다. 루이스의 연인 에밀리를 연기한 클레어 포이는 2014년 개봉한 <레커스>에서 컴버배치와 부부로 만난 후 이번 영화에서 다시 한번 부부로 재회했다.
영화는 루이스와 에밀리의 만남에서 시작해 에밀리를 상실한 이후의 루이스의 삶을 톺아간다. 전반부는 에밀리와의 만남부터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을 그렸다면 후반부는 에밀리가 떠난 후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고양이 그림에 몰두하며 삶의 굴곡을 겪어내는 루이스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다. 루이스 웨인은 그림뿐만 아니라 발명 등 다양한 일에도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자신의 재능을 원하는 만큼 마음껏 펼치지 못했다. 그리고 가족들의 반대와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고 결혼한 에밀리와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고, 금전적 이치에도 밝지 못해 자기 작품에 대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면서 경제적 어려움 시달리며 삶의 굴곡을 겪어야 했던 인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괴짜의 굴곡진 삶을 표현해낸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돋보이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는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연출을 위해 화면 비율을 실제 캔버스와 동일한 4:3 비율로 재현해 냈고, 감독은 촬영 감독과 함께 루이스 웨인의 그림을 연구하고 촬영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관객들을 루이스 웨인의 마음속으로 데려가 그의 감정과 그림을 생생하게 공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덕분에 컷마다 마치 수채화 보는 것 같았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상하거나 기묘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 편견을 갖지 말라”는 메시지도 전하고 싶었다고. 루이스 웨인은 괴짜 같은 면모와 환영받지 못했던 결혼 등 여러모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그가 그렸던 고양이 역시 당시에는 쥐를 잡기 위해 집에 들이는 가축에 가까운 존재에서 루이스의 그림을 통해 귀엽고 사랑스러운 반려동물로 거듭났다는 걸 생각하면 편견에서 벗어나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마리's Clip
“이것만 기억해. 아무리 힘들어져도 아무리 인생이 고되게 느껴져도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는 걸. 그걸 포착하는 건 당신에게 달린 거야. 그걸 보는 것도. 최대한 많은 사람과 나누는 것도. 당신은 프리즘이야. 삶의 빛을 여러 색으로 굴절시키는 사람” - 에밀리
에밀리가 떠나기 전 루이스에게 그림을 계속 그리기를 당부하며 남긴 한 마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고달프면 세상의 밝은 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금전적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루이스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에밀리가 말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나는 여러모로 낙관적인 사람보다는 비관적인 사람에 가까운지라 역시 뼈아픈 자기반성을 하게 한 대사라 고른 한 마디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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