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23. 무더위를 날려버릴 질주
나는 무더위를 극복하고 싶을 때면 카 체이스 장면이 돋보이는 영화를 찾아서 본다. 시원하게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고 있으면 묘한 쾌감과 함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라 더위도 함께 달아날 것 같다. 무더위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한여름의 끝자락에 기록하는 23번째 씨네아카이브는 카 체이스 장면이 돋보이는 영화 중 좋아하는 작품 2편을 골랐다.
"씨네아카이브 Issue 23. 무더위를 날려버릴 질주" 전문 읽기
<포드V페라리 (Ford V Ferrari)>, 제임스 맨골드, 2019년 개봉
<포드V페라리>는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레이싱 전기 영화로 1966년, 포드의 CEO 헨리 포드 2세의 지시에 따라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페라리를 꺾기 위한 포드의 도전과 숨은 주역이었던 셸비 아메리칸의 자동차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에 등장하는 ‘르망 24시’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레이싱과는 결이 조금 다른데 단순히 속도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닌 자동차의 내구성까지 평가하는 경기다. 24시간 동안 한 차량을 3명의 레이서가 교체하며 경주하여 빠르고 내구성까지 좋은 자동차를 가려낸다. 영화는 1965년 첫 도전 후, 이듬해 1966년 매년 우승하던 페라리를 꺾고 우승한 포드의 영광과 그 뒤에 가려져 있던 ‘캐롤 셸비’와 ‘켄 마일스’의 실화에 기반하고 있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크리스찬 베일이 포드의 테스트 드라이버 ‘켄 마일스’를, <본 시리즈>의 맷 데이먼이 포드 GT의 디자이너이자 셸비 아메리칸 창업주 ‘캐롤 셸비’ 역을 맡았다. 감독은 거의 동시에 두 사람에게 배역을 제안했는데 크리스천 베일은 “맷 데이먼이 하면 하겠다”, 맷은 “크리스천이 하면 하겠다”라고 답해 두 배우의 만남이 성사됐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왜 두 배우가 서로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내보였는지 알 수 있는데 서로 대비되는 캐릭터 사이의 합이 중요한 만큼 두 사람의 연기 앙상블이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켄 마일스’는 영국 출신의 레이싱 선수로 영화에서 다뤄지는 포드의 레이싱카(포드 GT) 탄생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포드가 르망 24시 참가를 위한 자동차를 제작할 때 레이서로 참여하여 직접 차를 몰고 개선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캐롤 셸비’ 역시 르망 24시에서 우승한 레이싱 선수인데 심장 질환으로 레이서에서는 일찍 은퇴했지만, 고성능 자동차 개발에 관심을 두고 레이싱카 튜닝 전문 업체인 ‘셸비 아메리칸’을 설립하여 켄 마일스와 함께 포드의 레이싱카 개발을 이끌었다.
1950년대, 매출 감소에 빠진 포드는 판매 활로를 찾기 위해 스포츠카 레이스를 장악한 페라리와의 인수합병을 추진한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력에도 불구하고 계약에 실패하고, 엔초 페라리로부터 모욕까지 듣게 된 헨리 포드 2세는 르망 24시에서 페라리를 박살 낼 차량을 만들 것을 지시하는데... 과연 포드와 페라리의 대결에서 미소 지을 승자는 누가 될까?
영화는 두 주인공이 협업을 통해 포드의 르망 24시 우승을 이끌어 나가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과정에서 셸비와 마일스 각자가 마주한 실존적 결단에 관한 이야기로도 보인다. 그리고 이는 오프닝과 엔딩 속 내레이션을 통해 암시된다.
“7000 RPM 어딘가에는 그런 지점이 있다. 모든 게 희미해지는 지점. 차는 무게를 잃고 그대로 사라지고 남는 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몸뿐이다. 7000 RPM, 바로 거기서 만나는 거다. 그 순간 질문 하나를 던진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너는 누구인가?’ ”
두 주인공은 영화의 종반부에 다다르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고, 두 사람의 과제와 목표는 서로 반대되는데 셸비는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야 하고, 마일스는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답해야 한다.
셸비와 마일스는 완전히 정반대 되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명쾌하게 표현하면 셸비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줄 아는 ‘현실주의자’, 마일스는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정반대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은 함께 하는 동안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셸비는 타인에게 맞춰 무조건으로 타협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며 조금씩 ‘나는 누구인가’를 깨닫는다. 마일스 역시 본인의 신념을 고수하던 모습에서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는 듯 보이는데 이는 르망 24시 단독 우승의 기회를 포기하고 포드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두 주인공은 ‘포드’와 ‘페라리’라는 거대 자동차 회사에도 대입해서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포드를 대변하는 것은 셸비 팀과 대립각을 세우는 포드 경영진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표면적인 상징에 불과할 뿐 진짜 포드를 상징하는 건 셸비다. 포드는 양차 대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들을 겨냥해 ‘대량생산을 통해 최대 다수의 만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성공했는데 셸비는 마케팅도 잘하고, 때로는 속에 없는 말도 할 줄 아는 현실적인 인물로 자본주의 사회의 비지니스 구조를 정확히 파고든 포드와 닮았다. 페라리를 상징하는 건 마일스다.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마일스처럼 페라리 역시 ‘한 사람이 차량 전체의 공정을 책임지는 수공업 방식’을 고수하는 기업으로 이런 고집스러움 때문에 페라리와 마일스 모두 파신 직전에 이르기도 한다. 그리고 장인은 장인을 알아본다는 말처럼 영화에서 르망 24시 경기가 끝나고 마일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 역시 엔초 페라리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단순히 포드와 페라리의 대결을 다룬 가벼운 레이싱 영화라 생각했었다. 장르 안에서 실존적 위기에 직면한 주인공들이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영화의 후반부가 잔상처럼 오래 남았는데 평소의 마일스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을 수락하고, 눈 뜨고 코 베인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다음 경기를 위해 개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셸비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묵묵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가는 진정한 장인처럼 보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쪽은 현실이고, 냉정한 현실에서 ‘신념’을 지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돈이면 다 된다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묵묵히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팍팍한 현실을 견뎌내는 우리에게도 많은 울림을 선사한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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