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24. 킬리언 머피 특집 Part.2
밤공기가 제법 서늘해진 9월의 씨네아카이브는 다시 돌아온 배우특집! 그중에서도 눈빛으로 관객들뿐만 아니라 감독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은 배우 특집이다. 첫 주자는 킬리언 머피. 오묘한 분위기의 마스크와 깊고 푸른 눈이 특히 매력인 아일랜드 배우로 개봉 후 여전히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오펜하이머>로 인해 입덕하는 분들이 더 많아졌을 것 같다. 사실 9월 주제로 생각해 둔 것이 있었는데 <오펜하이머>를 보고 바꾸게 된 것도 킬리언 머피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다. (원래도 좋아하는 배우였지만 좀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킬리언 머피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오랜 시간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음에도 주연을 맡은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에 한 번, 반대로 역할의 비중과 관계없이 짧은 시간 출연했음에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씨네아카이브 24. Eyes blue like the Atlantic (배우특집 ep.4 킬리언 머피)" 전문 읽기
<오펜하이머 (Oppenheimer)>, 크리스토퍼 놀란
<오펜하이머>는 개봉 이후 200만 관객을 넘기며 지금까지도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고 있는 킬리언 머피의 가장 최근작이다. 상영 중인 영화를 소개한 적은 한 번도 없음에도 킬리언 머피 특집에서 <오펜하이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추천작으로 선정했다. 무엇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리면서도 주연을 맡은 적은 없었던 킬리언 머피의 첫 주연작이기도 하니까. 영화에는 킬리언 머피 이외에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플로렌스 퓨, 조시 하트넷, 라미 말렉, 데인 드한, 캐네스 브래너, 케이시 애플렉, 게리 올드먼 등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쟁쟁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오펜하이머>는 놀란 감독이 장르로서는 처음으로 다루는 전기 영화로 미국의 핵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며 원자폭탄을 개발한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집필한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바탕으로 한다. 원작 도서는 한국어판 분량만 1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만큼,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집필되었는데 두 저자가 25년에 걸쳐 모은 오펜하이머의 개인 문서와 유품, 수천 쪽에 달하는 FBI의 기록물과 녹취록, 100여 명 넘는 오펜하이머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주된 자료로 삼았다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평전 외에도 음악, 영화 등 여러 요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스토리의 바탕이 된 것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지만 오펜하이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스팅이 냉전 시기 구소련 체제를 비판하며 불렀던 “Russians”의 가사였다고. 가사에는 ‘How can I save my little boy from Oppenheimer’s deadly toy?’라는 구절이 있는데, ‘little boy’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무기의 이름을 의미한다. 오펜하이머와 대립하는 스트로스와의 관계성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경쟁심리를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를 참고하여 스토로스를 연기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권모술수를 행할 때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의 요청사항을 그대로 연기로 구현해 내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감탄하게 된다.) 오펜하이머의 스타일은 데이비드 보위의 외양을 참고했는데 실제로 깡마른 체구를 가졌던 오펜하이머의 외모를 재현하되, 그의 고독함과 예민함은 보위 특유의 분위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오펜하이머>는 제작 과정에서부터 팬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놀란 감독은 CG 사용을 지양하는 것으로 유명한 만큼 핵무기 개발을 다룬 전기 영화 제작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에도 CG 없이 촬영할 것인가가 큰 화두였는데 정말로! CG 없이 트리니티 실험 장면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진짜 핵실험을 한 것은 아니고 재래식 폭약을 사용하여 비슷한 폭발 효과를 연출한 것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을 위해 미국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과학 파트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오펜하이머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과학자 동료들을 모아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간다. 마침내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과 함께 2차 대전도 종식되자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언론과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손에서 대량살상 무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물리학자로서의 명성과 인간으로서의 고뇌까지 모두 그린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내가 영화를 감상하는 패턴은 ①시놉시스를 읽어보고 흥미가 생기면 ②간략한 정보만 읽고 영화를 본 후 ③궁금했던 점은 추가로 더 찾아본다. 하지만 <오펜하이머> 만큼은 개봉 전부터 틈틈이 영화에 관한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 모태 문과생인 관계로 수많은 과학자와 물리학 이론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영화를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력 덕분인지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몰입하여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더불어 영원히 모른 체 살 것 같았던 과학 (지식까지는 아니고…) 상식도 얻었고.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뉘는데 오펜하이머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컬러 화면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스트로스 시점에서 진행되는 흑백 화면으로 구분된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두 시점이 교차하면서 오펜하이머의 시점에는 ‘핵분열’, 스트로스의 시점에는 ‘핵융합’이라는 타이틀이 짧게 표기되는데 이는 나중에 나오게 될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개발과도 연관되어 있다. 원자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통해 만들어지고, 수소 폭탄은 핵융합 반응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원자폭탄 개발을 이끈 인물이 오펜하이머라면, 원폭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현상을 통해 만들게 된 수소폭탄과 미국의 수소폭탄 제조를 지지하며 위원회를 이끈 인물이 스트로스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며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기여한 물리학자로 21살에 하버드를 2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명석했으며, 6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공부한 지 일주일 만에 네덜란드어로 강의하는 모습에 놀라워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실험물리학을 공부했지만 자신은 이론물리학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독일의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이론 물리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당시 괴팅겐은 양자역학의 본산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그의 지도교수는 양자역학의 혁명을 주도했던 막스 보른이었다. 이후 버클리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어 후학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발탁된다. 영화를 통해 물리학자로서 오펜하이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 물리학의 혁명기로 불리는 시기에 그 중심지에서 공부하며 학위를 받았고, 이후 미국에서 이론물리학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한 국가의 비밀 프로젝트를 맡아 과학자들을 이끄는 책임자로 임명된 것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실험물리학자도 아니고 대규모 연구진을 이끈 경험도 없으며 무엇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 중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다수였지만 정작 오펜하이머는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그럼에도 그가 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펜하이머의 잠재력과 천재성을 알아본 그로브스 장군이 파트너로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로브스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미지까지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오펜하이머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던 것. 특히 개성이 뚜렷한 과학자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오펜하이머의 강인한 리더십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임을 생각한다면 그로브스의 선구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는 정말 많은 과학자가 등장하고 과학 상식을 전제로 하는 대사도 많은 데다 전기영화라는 점 때문에 자칫 어렵지 않을까 걱정될 수 있지만 극이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고, 인물과 인물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바뀔 때마다 이해하기 쉽도록 짜인 플롯 덕분에 영화를 따라가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무엇보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보며, 권력의 요구에 맞서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특히 인물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대사들이 많았던 만큼 대사를 다시 곱씹어 보고 싶어 재관람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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