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30. 뉴욕의 겨울을 담은 로맨스 영화
나는 유독 뉴욕의 겨울에 대한 로망이 크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비트 삼아 상점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을 듣고, 센트럴 파크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록펠러 센터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소원을 빌고, 새해에는 타임스퀘어에서 이브 볼 드롭 카운트다운 행사와 함께 신년을 맞이하는, 화려함과 소박하지만 따뜻한 분위기가 공존하는 겨울 도시는 뉴욕이 유일한 느낌이랄까. 뉴욕의 추위는 우리나라 한파 못지않다지만, 도심 곳곳을 가득 채운 크리스마스 장식만 봐도 뉴욕의 겨울은 한없이 따뜻하고 낭만적일 것만 같다. 그래서 선택한 2023년 ‘영화로 떠나는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뉴욕! 겨울의 뉴욕을 담은 달달한 핫초코 같은 로맨스 영화 2편을 소개한다.
"씨네아카이브 30. Winter Wonderland in NY (영화로 떠나는 여행 ep.4)" 전문 읽기
<매기스 플랜 (Maggie’s Plan)>, 레베카 밀러, 2015년
<매기스 플랜>은 에단 호크, 그레타 거윅, 줄리앤 무어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으로 <비포 시리즈>의 에단 호크가 오랜만에 로맨스 영화로 관객들을 찾아 더욱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프란시스 하>에서 엉뚱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프란시스를 연기하며 배우로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그레타 거윅이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갖고 싶은 감성 뉴요커 ‘매기’로 분해 그녀만의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극대화하며 이전 작품보다 한층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작품마다 독보적인 분위기와 연기력을 선보이는 줄리앤 무어가 존의 전 부인이자 성공한 작가 ‘조젯’을 맡아 푼수 같은 코믹한 연기로 반전 매력을 선보이며 캐릭터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연출을 맡은 레베카 밀러 감독은 친구이자 작가인 카렌 리날디가 쓴 미완의 책 한 권에 실린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매기스 플랜>의 각본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집필 전부터 배역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적어두고 각본을 쓰기 시작했고 그녀가 생각한 인물이 에단 호크, 그레타 거윅, 줄리앤 무어로 각본 작업 단계에서부터 배우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3명의 배우가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며 빈틈없는 캐스팅이 완성됐다. 특히 감독은 다채로운 감성을 가진 ‘매기’ 역할에 그레타 거윅을 캐스팅하기 위해 가장 많을 공을 들였다고 밝혔으며 그레타 거윅 역시 각본에도 참여하는 등 작품에 열정을 쏟아냈다.
<매기스 플랜>은 뉴욕의 겨울을 아름답게 담아내며 사랑에 빠지고 싶은 뉴욕 로맨스를 따뜻하지만 재치 있게 그려냈는데 감독은 제대로 된 뉴욕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제작진과 촬영이 시작되기 1년 전부터 회의를 거듭하며 뉴욕의 일상을 따뜻한 색감으로 담아내기 위해 고민했다고 한다. 특히 뉴욕의 화려함보다는 일상을 꾸밈없이 보여주기 위해 로케이션 선정에 고심하며 뉴욕만의 겨울 감성을 배가시켰다. 빈틈없는 캐스팅과 제작진의 노력이 빛을 발한 <매기스 플랜>은 공개와 동시에 평단을 비롯해 유수의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더불어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영화제로 꼽히는 토론토 국제 영화제를 비롯하여 뉴욕 필름 페스티벌, 선댄스 영화제 등에서 관객들에게 호평받으며 대중성 역시 입증했다.
아이는 갖고 싶지만 결혼은 원치 않는 감성파 뉴요커 ‘매기’는 소설가를 꿈꾸는 어른아이 같은 대학교수 ‘존’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존은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소설을 좋아해 주는 매기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매기 역시 존과의 결혼으로 그토록 원하던 귀여운 딸을 얻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존에게서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과 다른 점을 발견하며 존이 변해가는 것을 느끼자, 뜻밖의 결심을 하게 되는데...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난 후 그다음이 궁금해지는 매기의 계획(Maggie’s Plan)은 과연 무엇일까?
매기는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가치 실현을 위해 대학 동창에게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으려 하지만 멀리 보면 이 또한 관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할 만큼 사랑에 어리숙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연히 시작된 존과의 만남은 그것이 불륜이라는 사실도 잊을 만큼 순식간에 불타오른다. 매기를 향한 존의 사랑은 일종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작가로 성공을 거둔 부인 조젯과의 결혼 생활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존은 매기를 통해 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배려와 안정감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얼떨결에 시작된 존과 매기의 관계는 결혼 그리고 딸 릴리의 출생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전 부인의 그늘에서 벗어나 배우자의 배려 속에서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존에게 결혼 생활은 낙원이다. 그러나 집에서 글만 쓰는 존 때문에 경제활동도 집안일도 딸의 양육도 모두 자신의 몫이 되어버린 매기에게 존과의 결혼은 자신의 인생 계획에 없었던 일이자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매기는 ‘내 인생 계획은 내가!’를 외치며 자신의 인생을 운명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 나갔다. 이런 매기의 삶에 결혼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존과 사랑하고, 결혼해 함께 아이를 낳으면 행복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무엇보다 존과의 결혼생활에서 매기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매기는 주체적인 여성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기를 원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존과의 결혼으로 솔직하고 당당했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결단을 내리게 되는 거다. 나는 인생을 결코 우연에 맡기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가는 매기의 태도가 부럽기도 했다. 심지어 엇나가 버린 삶의 방향키를 다시 되돌리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닌 본인의 선택이었으니까. 나에게 <매기스 플랜>은 온기로 가득한 뉴욕의 겨울만큼 매기의 의지와 다짐이 반짝이는 영화였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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