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81호
2월의 씨네아카이브는 오랜만에 영화제 수상작 특집이다. 몇 해 전 발행한 아카데미, 선댄스, 칸 영화제 특집에 이은 2번째 주인공은 매년 2월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되는 베를린 영화제! 베를린 국제 영화제(Berinale)는 프랑스 칸, 이탈리아 베니스 국제 영화제와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 3대 영화제로 자리 잡았지만 상대적으로 칸과 베니스보다 화제성은 낮은 편에 속한다. 아무래도 한국 영화가 칸과 베니스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반면 베를린에서는 아직까지 작품상을 수상하지 못하면서 국내 인지도가 다른 두 영화제보다 낮을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대중적 인지도와 별개로 매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재능 있는 감독을 꾸준히 발굴해 내고 있으며 특히 다른 영화제보다 사회적 ・ 정치적 색이 짙은 작품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상작 면면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장르와 이야기에도 열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번 베를린 영화제 특집에서는 역대 황금곰상 수상작 중 시대와 국적, 장르를 아우르며 평범한 삶의 순간을 포착해 울림을 전하는 영화 3편을 골라봤다.
씨네아카이브 81. "베를린 영화제가 선택한 영화들" 전문 읽기
<레인 맨 (Rain Man)>, 베리 레빈슨, 1988년 개봉
<레인 맨>은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유산과 함께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형의 존재를 알게 된 동생이 유산을 나눠 받기 위해 형과 함께 동행하게 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형제애와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휴먼 드라마로 제39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작이다. (<레인 맨>은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영화 <레인 맨> 줄거리
불화로 아버지와 연을 끊고 자동차 중개상을 하며 살아가던 찰리는 어느 날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장례식을 찾은 찰리는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올드카 한대와 정원의 장미꽃만 남기고 나머지 재산은 존재조차 몰랐던 형에게 물려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하고 있는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빚에 시달리던 찰리는 자신 몫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형 ‘레이먼드’의 거처를 수소문해 자폐증 환자인 형이 머물고 있는 보호시설을 찾고 유산을 나눌 목적으로 보호자를 자처하며 형을 보호소 밖으로 데리고 나와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그러나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를 타지 않으려는 형 때문에 횡단도로를 따라 2주간의 여행 아닌 여행길에 오르게 되고 형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잊고 있던 어린 시절 형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고 형제애를 되찾기 시작한다.
할리우드 영화가 유럽 국제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는 당시 베를린 영화제가 친 할리우드 노선을 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로 당시 독일 영화계에서는 할리우드 영화에 작품상을 수여하는 것을 두고 치열한 찬반논란이 벌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제목인 ‘레인 맨’은 주인공 찰리가 어릴 적에 형 ‘레이먼드’를 부르던 별칭으로 자신의 어릴 적 상상 속 친구라고 생각했던 ‘레임 맨’이 자신의 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레인 맨>은 영화가 전화는 메시지도 인상적이지만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레이먼드’를 연기한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더스틴 호프만은 원래 찰리 역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서번트 증후군 자폐성 장애인으로 협주곡을 귀로 듣고 피아노로 연주해 내는 ‘레슬리 렘키(Leslie Lemke)’라는 실존 인물을 보고 레이먼드 역을 맡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히며 이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에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극 중 레이먼드가 앓고 있는 ‘서번트 증후군’은 뇌기능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계산, 암기, 음악, 미술 등 특정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이외의 일상생활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 현실이며 실제 자폐성 환자 중 극히 일부만이 서번트 증후군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80년대만 해도 서번트 증후군은 물론 자폐증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는데 영화의 흥행과 수상을 기점으로 대중들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자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결혼 피로연>, 이안, 1993년 개봉
<결혼 피로연>은 사랑과 가족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주인공이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가짜 결혼식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이안 감독은 문화적 세대 차이에서 비롯되는 전통적 가치관의 충돌과 가족 간의 갈등을 유쾌하고 따듯하게 그려내며 제43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이안 감독은 이후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두 번째 황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결혼 피로연> 줄거리
대만에서 뉴욕으로 건너와 부동산 딜러로 일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웨이퉁은 애인 사이먼과 동거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아들의 성 정체성을 모르는 웨이퉁의 부모님은 그가 하루빨리 결혼해 손주를 안겨 주길 고대하고 이에 웨이퉁과 사이먼은 부모님과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방안을 생각해 낸다. 바로 웨이퉁이 관리하는 건물 세입자인 웨이웨이와 위장결혼을 하는 것! 영주권이 필요했던 웨이웨이는 그들의 제안을 수락하고 아들의 결혼 소식을 듣고 뉴욕까지 날아온 웨이퉁의 부모님은 두 사람이 대만식 전통 혼례와 함께 결혼 피로연을 치르기를 원한다. 세 사람의 완벽한 연기로 위장 결혼은 성공한 듯 보였지만, 결혼 피로연에서 발생한 예상치 못한 사고로 그들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영화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색, 계>, <라이프 오브 파이> 등 이안 감독하면 바로 떠올리는 작품들과 달리 대중들에게 크게 인식되지 않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안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초기 작에 해당하며 <쿵후선생>, <음식남녀>와 함께 감독의 개인사가 담겨 있는 ‘아버지께서 제일 잘 아신다’라는 주제의 3부작 중 하나로 모두 문화적 세대 차이와 갈등을 소재로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게 되는 가족의 의미를 그린 작품들로 대만 이민자 부모 세대 가정에서 자라 미국에서 공부한 이안 감독의 정체성이 가장 많이 반영된 작품으로 꼽힌다.
'아버지 3부작' 중에서도 <결혼 피로연>은 부모와 자식 세대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갈등을 ‘결혼 피로연’이라는 사건을 통해 유쾌하지만 깊이 있게 조명해 호평받았는데 2025년에는 리메이크 버전이 개봉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원작은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지 못했지만 리메이크 버전은 기회가 되어 볼 수 있었는데 문화적 세대 차이를 넘어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도록 그려낸 방식이 인상적이다. 리메이크 작의 경우 원작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원작의 분위기와 감성은 살리면서도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변화를 반영해 시대에 맞는 각색을 더했다고 하는데 이안 감독은 원작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구체적인 비전이 있다면 리메이크해도 좋다고 밝히기도 했다고.
<택시>, 자파르 파나히, 2015년 개봉
<택시>는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연출, 각본, 제작, 촬영, 편집, 주연까지 도맡아서 완성한 작품으로 이란 정부로부터 20년간 영화 제작 및 출국 금지 처분을 받게 된 감독이 택시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란 사회가 처한 현실과 단면을 담담하게 기록해 나간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로 제6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써클>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택시>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데 이어 2025년에는 <그저 사고였을 뿐>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계 3대 영화제 작품상을 모두 거머쥔 유일한 감독이 되었다.)
영화 <택시> 줄거리
영화 촬영을 위해서는 사전 허가가 필수고 극장 상영 역시 엄격한 허가를 거쳐야만 하는 나라, 이란. 20년 간 영화촬영금지에 해외출국금지를 당한 이란의 거장 감독 자파르 파나히는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 끝에 택시 기사가 되기로 한다. 선루프를 조명 삼아 계기판 옆 티슈통에 카메라를 숨긴 노란 택시는 테헤란 곳곳을 누빈다. 불법 DVD를 파는 청년부터 배급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의 어린 조카와 정시에 맞춰 알리의 샘에 물고기를 놓아줘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할머니들, 감독의 계획을 응원하는 인권 변호사까지. 택시 안에 갇혀 있을지언정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이란에서 여전히 따뜻한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전한다.
영화는 감독이 직접 운전을 하며 선루프에 몰래 설치한 카메라를 통해 승객들을 만나며 대화를 나누고 그 속에서 이란 사회의 현실을 유쾌하지만 비판적으로 그려냈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감독이 승객들과 나누는 대화를 살펴보면 승객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진짜 승객인지 아니면 배우의 연기인지 모호해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다큐인가 페이크 다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탄압과 수많은 제약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의 집념과 그 속에 이란의 사회적 현실을 녹여내는 감독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영화를 끝까지 감상하고 나면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강렬한 본능은 자유의지이며 형식을 가장한 날것의 진실을 전하는 이야기야말로 가장 영화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영화 뉴스레터 ciné-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