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 3

by 김본이


새벽까지 짐을 싸고 오랫동안 비워둬야 하는 서울집을 구석 구석 청소했다.

그리고 남의 동생이지만 친동생처럼 생각해 주는 나라 언니(은평구 자궁이 나아준 나의 또 다른 혈육이다)가 공항까지 배웅을 해주기로 해서 스벅에서 슈크림라테를 드라이브스루하는 우아함까지 떨며 공항에 갈 수 있었다.

나라언니와 시시덕거리다 보니 금세 공항에 도착했다.

오래 정차할 수 없는 공항 드롭존에서 후다닥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언니는 떠났다.

그리고 정말 혼자가 되어서 공항에 들어서니 해외를 나간다는 설렘은 전혀 없고 앞으로 혈혈단신으로 미지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생각하니 긴장감만 가득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이 모든 순간들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으니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

그럼에도 친구들이 보내주는 응원의 메시지 덕분에 용기를 한껏 충전했다.


수 없이 마주한 망설임과 두려움의 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나는 오클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타보는 대한항공은 이코노미석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좋았다.

구겨져서 가야 했던 저가항공과는 다르게 좌석도 넓고 맥주도 계속 주고 비건 기내식도 맛있었다.

맥주를 양껏 마시고 싶었지만 창가석이라 아쉬운 마음을 남겨둬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통로석에 앉을 걸 그랬다...ㅎㅎ )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얼 올 앳 원스" 영화가 있어서 좋았다.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이 순간으로
그것만은 잊으면 안 돼.

(내 삶의 어떤 거절과 실망들이 합쳐져서 지금 이 순간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를 이 순간으로 이끌어온 그 시간들을 기억하고 싶다. )


인생의 사소한 결정들이 엄청난 차이로 이어져 결정의 갈래길마다 우주가 분열되고...

(내가 아침에 눈을 떠서 물을 먼저 마실지 화장실을 먼저 갈지에 대한 결정들에서도 우주가 분열되는데 한국을 떠나보기로 한 나의 결정으로 어떤 우주의 분열이 일어났을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


처음 에에올 영화를 봤을 때는 웨이먼드의 대사가 그렇게 공감이 됐었다.

물론 다시 볼 때도 여전히 웨이먼드의 다정한 대사는 내 삶의 모토와 잘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모든 우주와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여 허무주의에 빠진 조부 투바키의 대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좀 냉소적으로 변했나 보다.)


"전부 다 부질없다는 것"


너무 좋잖아?

다 부질없는 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지잖아.

모든 거절과 모든 실망으로 뭉쳐진 쿠키 반죽을 보며 괴로워하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잖아?!

사소한 결정으로 뒤바뀌어 버린 나의 우주를 탓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다 부질없으니 이 한 줌의 시간인 오늘을 사랑하면 되는 거잖아.


워킹홀리데이의 어떤 게 성공이고 실패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한 실패를 두려워하며 겁먹고 있던 나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 대사였다.

허무주의에 빠진 조부 투바키에게서 내 뉴질랜드 워홀의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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