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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나 Dec 07. 2024

아홉째 날

쓰러지다

어제 스무 장의 구들돌을 놓았다. 건축자재 상점에서 사 온 구들돌은 잡기가 편해 나르기가 오히려 수월하단 걸 알게 되었다. 두께도 모양도 밀도도 들쭉날쭉인 천연의 구들돌을 나를 때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저녁 때 마지막 한 장을 나르다가 하마터면 엄지발가락을 찧을 뻔했다.


오늘은 날이 흐리다. 아침에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서 잠에서 깨어났다. 특히 뒷머리가 아팠다. 더운데 너무 힘을 써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뭐든지 혼자서 할 수 있는 이나 씨’ 아닌가! 하지만 너무 몸이 뻐근했다. 몸을 풀어줄 겸 마당에 나가 시험 삼아 막대기 들고 해동검도 기마세, 소도견적세 자세를 취해 봤다. 검끝에 시선을 두고 하체에 힘을 넣어야 하는 검도의 기본자세이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명색이 유단자인데 오 분도 못 버틴 것 같았다. 


2단을 따느라고 그 옛날 4년을 분투했건만, 검도를 그만둔 지도 어언 같은 기간이 흘렀으니... 머릿속에서는 변명만이 맴맴 도니 몸은 자꾸 균형을 잃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 하체여...! 그래도 검을 한번 빼들면 무라도 베야 한다고, 대나무베기 했던 일을 떠올리며 허공에 대고 정면베기를 했다. 아냐, 아냐! 이건 검이 아니라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 같잖아! 호랑의 사범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무지 정신 집중이 안 되었다. 흐릿한 눈앞이 이번에도 대실패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구들돌이 방 면적의 반쯤 놓여졌다. 오늘은 나머지 반을 놓아야 한다. 최진이가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버렸다. 그는 바쁘고, 또 무엇보다도 내가 스스로 몽땅 다 하고 싶으니까 말이다. 마당에서 암수 딱새가 대화라도 하듯 번갈아 다정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나는 마디가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은 손으로 또 하나의 구들돌을 들어올렸다. 돌을 들고 있지 않았어도 비틀거렸을 발걸음을 한 발짝씩 내딛으면서 나아갔다. 기단 턱, 현관문 턱, 방 턱에 걸려 쓰러지지 않도록 쇳덩이 같이 무거운 발을 끌어올려 턱들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야 했다. 구들돌을 알맞은 고래둑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 쉰다. 한참 뒤에 정신이 돌아오면 허리를 굽혀 아까 놓았던 구들돌들을 매만지면서 제대로 놓였는지 본다. 나는 몸을 구부리고 그 아래로 마치 미로같이 조성된 불의 길을 감상한다. 


이 아래로 불이 그 혀를 마구 넘실거린단 말이지. 불의 길은 구불구불 길기도 길었다. 불과 뜨거운 연기가 이 미로를 지나면서 저들 머리에 올라앉은 단단한 화강암을 뜨겁게 달군다. 근처에 원자폭탄이라도 떨어져서 돌이 녹아 액체가 될 지경만 아니라면 내 두 손으로 하나하나 올린 화강암은 끄덕도 않은 채 불사신처럼 죽지 않고 타오를 것이다. 달구어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지 몰라도 한번 열을 품은 다음에는 좀처럼 식지 않는, 그래서 뼛속까지 시린 겨울날 우리 아버지를 노곤노곤한 행복감에 젖게 해 주었을 구들방. 그 옛날 처음으로 쪽지고 상투 틀었을 새신부 새신랑들이 서로의 몸을 보듬고 사랑할 수 있게 해주었을 구들방. 나는 다시 일어나서 또 한 장의 구들돌을 가지러 간다.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돌들은 서로 몸을 부딪쳤을 때 말고는 말이 없었다. 그런 돌을 나르는 나도 뭔가 의미있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머릿속 역시 텅 비었다. 그때 쌓여 있었던 돌 기단 사이에서 갑자기 뭔가 스스륵 빠져 나갔다. 뱀이었다. 나는 놀라지도 않았다. 원래부터 돌 틈새는 작은 생명들의 보금자리였잖아, 뭐. 나중에야 새삼스럽게 뱀 생각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릴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 발짝 앞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마비된 것 같았다. 아버지가 말년에 말벌 집을 없애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벌이나 뱀 따위를 가지고 난리칠 기운이 없어서? 나는 그저 이 돌들을 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의미 없는 작업은 아니었다. 일이 끝나면 결과물을 얻고, 그에 따른 혜택(구들방을 짓느라 멍들고 지친 뼈와 근육을 찜질할 수 있다는)을 기대할 수 있었으니까. 


정말 그런가? 어? 정말 그러냐구! 별안간 화 아닌 화가 나서 얼굴로 피가 솟구쳤다. 이 골 빠지는 일을 한 다음에 얻을 수 있는 게 고작 손바닥만 한 뜨끈한 방이란 말이야? 서울에 버튼 하나만 누르면 얼마든지 뜨끈해지는 깨끗한 방이 있는데! 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따위 집은 그냥 헐값에 넘겨버렸어야 했다. 헐값에도 안 팔린다면 그냥 버려둬도 상관없는 집이었다. 내가 언제 아버지의 대단한 유산을 기대한 적 있었던가? 아아, 아버지는 내게 유산이 아니라 빚을 떠넘겨준 거나 다름없었다. 아, 빌어먹을! 그냥 상속포기라도 할 것을.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냥 다 내버려두고 샤워를 한 다음에 자물쇠를 채우고 여길 유유히 떠나는 거야. 도중에 최진이랑 기타 등등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도록 밤이나 새벽에 떠나는 것이 좋겠어. 


그때 창고 쪽에서 삐거덕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창고 지붕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 저 흙더미들... 구겨진 창고는 언제든지 더 구겨질 각오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저 창고 역시 내게 숙제였다.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위험했다. 철거를 해야 했다. 


누가 창고를 저 언덕 아래에다 지어 놨담? 아무래도 이 집을 지은 사람과 창고를 지은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일 듯 싶었다. 중이었을까? 무당이었을까? 다행히도 집은 산사태를 맞을 걱정이 없는 곳에 지어져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 내가 이곳에 없더라도 창고 철거는 할 수 있을 거야. 돈만 있으면 전화 한 통으로 사람을 사서 시킬 수 있잖아. 


돈 생각을 하니, 내가 왜 일꾼을 고용하지 않고 혼자서 구들방을 짓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진이는 물론 산불관리원 아저씨며 동네 사람들에게 걱정(혹은 양심의 가책)을 끼치는 민폐를 저지르면서 말이다. 이누크조차 내 작업을 따분해하고 있었다. 아, 저 하품하는 것 좀 봐! 내 고집 때문에 이누크도 이곳에서 나를 호위하는 일 아닌 일을 해야 했다!


나는 관성에 따라 일어나서 돌을 집어 들었다. 왠지 돌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돌을 들고 바지에 똥 싼 사람처럼 어기적거리며 방 안쪽으로 나른 뒤, 다리를 대자로 벌린 채 헉헉 숨을 내쉬고, 내가 이뤄 놓은 작지만 큰 성취에 감탄한 뒤에는, 무릎과 온 뼈마디의 아우성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때 잠시(?) 백일몽에 빠지며 온 세상을 저주해대다가 갑자기 시간이 없다는 듯 나는 벌떡 일어서 돌을 나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 과정을 벌써 열다섯 번이나 되풀이했다. 


먹을 것이 많았지만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날랐던 돌덩이에서 떨어져 나온 흙먼지가 입안에 가득한 듯 꺼끌거리기만 했다. 물만 계속해서 마셔댔다. 먹으려고 꺼내 뒀던 음식은 이누크에게 주어 버렸다. 이렇게 노동을 하는데도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다니. 그동안 내 살 곳곳에 만일의 경우를 위해(?) 쌓아두었던 지방이 이제야 때를 만났구나 싶었다. 30년 넘게 쌓아둔 걸, 하루 이틀 만에 다 소진할 수야 없겠지만, 당분간 이런 식으로 일하고 덜 먹는 것도 다이어트 방법이겠는걸. 


구들돌을 다 놓기 전에는 쉴 수가 없었다. 잠깐씩은 어쩔 수 없이 쉬었지만은, 어제처럼 드러누워 버리긴 싫었다. 나는 혹시 전에 나를 고고하게 내려다보았던 왜가리가 근처에 있지 않나 흘끔거렸다. 아니면 아버지는 조그만 흰나비가 되어 어딘가에 숨어 날 지켜보고 계신지도 모른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난 아버지의 진짜 자식이라구요. 아버지의 인생을 이어가는 건, 미래의 사윗감도, 미지의 여인도 아니라고요. 그런데 아버지, 왜 저를 찾지 않으셨어요? 왜 제가 필요하단 말씀을 안 하셨어요?


“이나 씨~!”


마리아였다. 벌써 점심때인가? 시계를 보니 점심때도 지나 있었다. 마리아는 이번에도 세순이를 데리고 왔다. 나는 팔등으로 얼굴의 땀을 쓱쓱 닦아냈다. 닦아낸 땀이 팔을 타고 땅으로 주루룩 흘러내렸다.


“어머, 이나 씨 얼굴 좀 봐! 쉬어야겠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데 마리아... 왜 세순이만 데리고 다녀요? 개 또 한 마리 있는 거 아니에요?”

“아, 세돌이? 왜, 세돌이도 산책시키지. 그런데 여기 올 때는 세순이만 데리고 온단다. 세순이랑 이누크랑 친하니까. 이누크는 세돌이를 못 본 척하거든. 세돌이도 이누크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고. 둘이서 어색하게 맴맴 돌고 있으면 나까지 마음이 불편해.”

“와, 이누크, 네가 친하게 들이대지 않는 개도 있는 거야? 놀랐는걸. 혹시 튕기는 건가? 하하.”


나는 유쾌하게 웃으려고 했지만 얼굴 근육이 마비라도 된 듯 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마리아가 말을 받았다.


“그러게. 세순이와 세돌이가 부부라고, 내외하나 봐. 호호호.”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면서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할 것 같았다.


“저, 잠깐만... (들어가 누울게요.)”


다음 순간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내가 언제 눈을 감았었나? 그런데 놀랍게도 얼굴이 흙바닥 위에 있었다. 입술에 흙이 묻은 것 같았다. 머리가 띵했다. 여태 흘린 것과는 다른 종류의 차가운 땀이 폭포수처럼 코와 입가를 흐르고 있었다. 땀에 익사할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귓가가 시끄러웠다. 아, 지금 내가 무슨 책의 마감을 하고 있기에 이리 어수선한 거지? 깜찍이가 안달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깝죽이가 ‘그러게 내 뭐랬어요?’라며 깝죽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쨌든 한 명 이상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 여기는 회사가 아니지. 그래, 아버지 집이야. 


내 몸이 규칙적으로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양손을 움직여 더듬어보니 굵은 봉 같은 게 만져졌다. 


‘에? 이게 뭐야? 내가 어디 누워 있는 거야?’


초인적인 힘을 들여서 딱 달라붙은 눈꺼풀을 떼 내자 하늘이 보였다. 나는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지만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몸이 허공에 떠 있는 듯 들것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에? 이거 뭐예요?”


들것 옆에 딱 붙어 걸어가던 마리아가 내 팔을 잡았다. 내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119구조대원들이 들것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대원들은 평균이상의 몸무게를 운반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나 씨, 쓰러졌었어. 나, 어찌할지 몰라서...”


이제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아마 119가 오기 전에 마리아가 내 몸에 물을 한 바가지 퍼 부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익사할 뻔했던 건 땀이 아니라 물 때문이었군...


“아이고, 저 괜찮아요. 너무 지쳐서 잠시 기절했었나 봐요. 이제 괜찮아요.”


별것도 아닌 일인데 괜히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한없이 송구스러웠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동네 사람들이 죄다 나와서 나와 내 들것을 마치 가마 탄 마나님 따르듯 엄숙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창피했다. 덩치가 산만한 여자가 좀 덥다고 픽픽 쓰러지다니.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이 뜨거운 날 쓰러지다니 걱정도 이만저만 아니야.”


부동산 아줌마가 말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여자 혼자 할 일이 아니라고 했죠?”


산불관리 아저씨가 마리아 쪽을 힐끔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고,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이. 돌아가신 자네 아버님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시겄는가.”


박카스 할머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사건이 접수됐으니 병원으로 일단 가셔서 결과를 봐야 해. 병원으로 가야 쓰겄어.”


119 명예대원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 이 할아버지가 여기까지 오셨네!


“맞아요. 이웃들 말은 안 들어도 의사 말이라면 듣겠죠. 아가씬 좀 쉬어야 해요. 여기로 휴가 온 것 아니에요?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산불관리 아저씨 옆 아주머니가 말했다. 


마리아를 마녀라고 부르던 사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마리아를 넋을 빼고 바라보고 있었다.

최진이가 없어서 안도했다. 그가 있었다면 얼마나 창피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어서 누워요.”


마리아가 내 어깨를 눌러 들것에 눕혔다. 순식간에 기운이 쑥 빠져 버린 듯, 마리아의 약한 손힘에도 맥없이 무너졌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들것에서 간이 침대로 옮겨졌고, 차에 태워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축축한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걸 느꼈다. 눈을 떠 보니 최진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아, 내가 왜 몰랐었지? 그의 손길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 나를 위로해주었던 그 손길과 똑같았다.


“아버지 돌아가신 날, 혹시 진 씨가 날 돌봐 줬어요?”


최진이가 멋쩍게 웃었다.


“기억, 났어요?”

“그날 절 만나지 않고 간 게 아니었어요. 제 추한 모습을 진 씨가 다 지켜봤군요...”

“추하다뇨, 아버지 부고에 우는 건 자식으로서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날... 끝까지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아니에요... 그리고 죄송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내 병명은 열사병에 과로였다. 머리와 양 겨드랑이에 차가운 얼음팩이 놓여 있었다. 적어도 일주일은 잘 먹으면서 푹 쉬어야 한다고 했다. 쉬긴 무슨... 제길...


애써 최진이의 손을 뿌리치는 시늉을 하면서도 결국은 최진이에게 기대어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마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굳이 당신의 집으로 나를 데려가야 한다고 우겼다. 


“적어도 하루라도 우리 집에서 푹 쉬었으면 좋겠어. 내가 엄마다 생각해.”


내가 말씨름하기도 귀찮아 허락하자 최진이는 새로운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그는 허겁지겁 자기 어머니의 요리 솜씨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저희 집에서 쉬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요리 솜씨는 나도 젊은이 어머니 못지않을 걸요? 그런 걱정은 말아요.”


마리아는 신난 것 같았다. 일 년 만의 손님이니 흥분하는 것도 당연한가? 최진이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과자집에 살고 있는 사악한 마녀가 자기의 귀여운 그레텔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진 듯했다. 아니면 그레텔을 인질삼아 마녀가 이 동네를 이리저리 휘두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나. 하긴 최진이는 내가 언제 어떻게 마리아와 친해졌는지 모르니까 불안해하는 건 당연했다.


“저도 오래 신세지긴 싫어요. 어차피 내일 모레 서울에 올라가야 해요. 휴가가 거의 끝나가거든요.”


착각일까. 내 말에 마리아와 최진이 둘 다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마을 도로에서 마리아의 집까지는 고속도로같이 매끈한 아스팔트가 쫙 깔려 있었다. 내 아버지가 도시에서 온 똘똘한 청년답게(시골에는 ‘진짜’청년이 없어서 60대 남자들이 다 청년회에 가입되어 있었다!) 민원을 올려 새로 만들게끔 했다는 다리를 지나, 모두가 공동으로 쓰는 1차선짜리 도로를 200미터쯤 올라오면 왼쪽으로 작고 오래된 다리가 하나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면 마리아 혼자 쓰는 도로가 줄지어 선 아름드리 단풍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가파르게 뻗어 있었다. 깜찍한 마녀 마리아의 은신처에 이르는 비밀스러운 길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커먼 개 두 마리가 뾰족한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무섭게 짖어대면서 금방이라도 울타리를 뛰어넘을 듯 달려들었다. 개들은 주인인 마리아를 보자 주춤하더니 이윽고 순하게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리아가 앞서가서 울타리 문을 열자 최진이는 겁먹은 듯이 물었다.


“개 안 물어요?”

“괜찮아요... 하지만 손님이 온 지 오래돼서 혹시 모르니... 잠깐만요.”


마리아는 정원으로 들어가더니 개들을 작은 울타리 안으로 몰아놓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나왔다. 개들에게 중얼거리며 뭔가 단단히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리아는 개들과 대화할 수 있는 여자 같았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저러니 시골 사람들이 마리아를 마녀라고 하지. 


“이제 됐죠? 자, 이나 씨를 안으로 데리고 가 줘요.”


마리아가 여왕처럼 최진이에게 명령했다. 나는 얼마든지 혼자 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최진이가 내 어깨를 감싸고 안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나를 들여다보았을 때 서로 얼굴이 닿을 듯했다. 아흐~.


최진이는 내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에어컨을 튼 집 안에서 맛있는 커피를 대접받고는 다시 시민의 손과 발로 되돌아갔다. 마리아와 내가 사실은 모녀지간이라는 알쏭달쏭한 농담을 마구 지르며 깔깔대자 그 친숙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안심을 한 듯했다. 


“전화할게요.”


최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나가자, 마리아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소파에 기대앉아서 옆얼굴을 살짝 묻었다.


“이나 씨, 진 씨가 이나 씨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흠... 글쎄요.”

“글쎄는 무슨 글쎄야. 아까 이나 씨 병원에서 자고 있을 때 내가 잠깐 떠봤지.”

“뭘요?”

“아니, 누가 진 씨한테 연락을 했는지 몰라도, (진 씨가 시의원이라며?) 이 넓은 시를 종횡무진하다가 이나 씨 쓰러진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거 보면 뻔한 거 아냐?”


마리아가 입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뗐다.


“이나 씨 아버지가(그래, 정수씨가) 다 사전 작업을 해 놓으셨던걸. 이나 씨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위삼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나 봐. 다시 말해, 진이 총각은 이나 씨 사진을 봤을 때부터 이나 씨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거지.”


마리아가 호호거렸다. 


“진 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나는 붕붕 날아오를 듯한 속마음과 달리 힘없이 물었다. 몸이 점점 땅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내가 그런 식으로 물어보니까 그냥 헤벌쭉 웃기만 하더라고. 저런 순진한 나무꾼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시의원이 됐는지 몰라. 하여튼 너무 멋진 얘기 아니야?!


마리아의 호들갑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마리아는 내가 여기 머무르는 짧은 기간 동안 어떻게든 진 씨를 붙잡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정말 마리아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붙잡으라고? 내가 무슨 표현을 해야 한다고? 마리아는 자기도 못한 걸 나더러 하라고 하다니... 마리아? 마리아는 왜 우리 아버지한테 좋아한다고 말 못 했어요? 마리아는 뜨끔해하는 듯했다. 거야, 우리 세대하고 이나 씨 세대하고 같아? 우리 세대는 여자가 너무 들이대면 남자는 도망가 버렸다구.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마리아가 나의 세대인 것 같았다. 적어도 아버지 세대로는 보이지 않는데... 아마 아버지는 정신연령이 한참 낮은 마리아가 부담스러웠을 지도 몰랐다. 아, 이 말은 마리아에게 하면 안 되는데, 마리아가 들었을까? 마리아는 나를 침대로 데려간 뒤에 병원에서 준 약을 먹였다. 그럼 마리아는 어디서 자요? 아, 내 걱정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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