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남자
병원에서 무슨 약을 줬는지 몰라도 무려 10시간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제 몇 시에 퇴원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더욱 계산이 불가능했다. 뭐, 아무려면 어때. 창밖을 내다보니 마리아가 개들과 함께 있었다. 분위기가... 이른 아침인 것 같았다. 가느다란 햇살은 신선한 내음을 풍겼다. 마리아가 개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찬란한 햇볕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 표면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온 집안을 꽉 채웠으니까.
창문 바깥으로 이상한 것이 매달려 있었다. 작은 새들이 그것에 매달려서 번갈아 콕콕 쪼면서 끊임없이 천상의 소리로 지저귀었다. 내가 아버지 집에서 관찰한 새 말고도 처음 보는 새들도 많았다.
“이나 씨, 깼어? 괜찮아?”
마리아가 쾌활하게 물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네. 정말 푹 잤어요. 고맙습니다.”
“에이 뭘. 새소리가 좀 시끄러웠지? 바깥 곳곳에 새 먹이를 매달아 놨거든. 견과류야. 덕분에 새들이 자명종 역할을 해 줘. 너무 멋지지 않아?”
나는 창밖에 매달린 새 먹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새들 꽁무니에서 다투어 구슬 같은 하얀 똥이 솟아나오더니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졌다.
“이것 좀 먹어 봐. 내가 죽 끓였어.”
죽은 놀랄 만큼 맛있었다. 아까웠다. 이런 현모양처가 평생 혼자 살았다니. 나는 감사의 뜻으로 마리아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에이, 귀여워!”
마흔이 다 된 여자한테 귀엽다니, 역시 마리아는 나이를 나보다 훨씬 많이 먹었군. 그런데 마리아는 아까부터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따라 바라보니까 바깥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최진이가 이상한 동작으로 집 안과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개가 달려들까 봐 섣불리 못 들어오는 것 같았다. 집 안을 들여다보려는 듯 펄쩍펄쩍 뛰면서 안에서 누가 알아봐 주길 바라듯이 양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마리아는 내가 아니라 마흔이 넘은 남자를 보고 귀엽다고 했던 것이다. 세순이와 세돌이는 어제 손님이었던 사람을 기억하는 듯했다. 전혀 짖어대지 않았다.
마리아가 나가서 최진이를 맞았다. 최진이는 어젯밤 푹 잤는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나 허우대가 정말 호감가게 생겼다. 여태 왜 이걸 몰랐지? 최진이는 내 안부를 묻고, 어제 있었던 소동을 하나하나 읊더니만 이윽고 이야기를 꺼냈다.
“마을 분들이 구들방 완성을 도와주신대요. 이나 씨는 마음 푹 놓고...”
“네? 안 돼요! 그런 폐를 끼칠 순 없어요!”
나는 가느다랗게 소리쳤다. 게다가 구들방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시간이 아무리 많이 걸리더라도 혼자 힘으로 그걸 완성하고 싶었다. 최진이는 그걸 몰라주는 걸까?
“물론 안 되죠. 이나 씨가 끝까지 완성해야 해요.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힘든 부분이 있으면 진 씨가 좀 도와 주면 되잖아요.”
마리아의 말에 최진이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이나 씨, 그런데 제 도움은 받으셨잖아요. 왜 제 도움은 되고, 마을 분들 도움은 안 되죠?”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때 마리아가 중얼거렸다.
“진이 씨도 참, 그 이유를 몰라요? 아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갑자기 최진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마리아가 우리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호호 웃으면서 정원으로 나가 버렸다. 둘만 남게 되자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다음 순간에는 힘이 쪽 빠져 버렸지만. 이유는 최진이가 손을 뻗더니 내 손 위에 가만히 포갰기 때문이다. 최진이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겨우 최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렇게 해요. 마을 분들은 이나 씨를 돕고 싶어 하고, 이나 씨는 혼자서 하고 싶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요. 시간은 얼마 없고요. 그냥 우리 다 같이 구들방을 완성하면 어때요?”
‘다 같이?’
그 즈음 나는 최진이의 부드러움에 녹아내릴 듯해서 반박할 힘을 잃고 있었다. 최진이가 말을 이었다.
“구들방의 완성은 새침이죠. 불을 피웠을 때 방 안으로 연기가 새어 나가지 않고 불길을 따라서 연기를 밖으로 죽죽 빠지도록 하는 거요. 이나 씨가 그렇게 구들을 잘 놓았다면 연기가 쭉쭉 빠져나가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작은 돌들을 틈새에 꼼꼼히 놓아서 연기 구멍을 최대한 다 막아야 하죠. 구들방 공사는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 위에 흙을 덮는 것쯤은 아무나 해도 된다고요. 혹시 허락하신다면 제가 직접 흙을 덮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앞의 이 남자, 너무나도 자상했다. 아버지와는 정반대였다. 아버지라면 무식하게 열사병에 걸리도록 일을 했다고 잔소리를 한 바가지쯤 쏟아 부었을 테니까. 최진이의 검은 눈썹은 예민하게 움직였고, 그의 구겨지긴 했지만 깨끗한 흰 티셔츠는 그가 편안한 사람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나 씨?”
나는 생애 두 번째로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