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지 않는 집
아침 출근시간에 맞추기 위해 꼭두새벽에 길을 나섰다. 서울 집에 들러서 씻고 출근하려면 지금은 떠나야 했다. 최진이는 출장 때문에 나를 배웅해 줄 수가 없다고 미리 말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남은 생애 동안 그가 내 가족이 되어 줄 것을 아니까.
갑자기 닭살이 확 돋았다. 자기 러브스토리에 닭살이 돋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즐거웠다. 어젯밤에 전화로나마 내 러브스토리를 다 들은 사람은 마리아였다. 며칠 만에 마리아가 내 옛 절친을 제치고 강력한 새 절친 후보로 등극했다.
“어머, 어머, 내 그럴 줄 알았어. 다 된 밥이었다구.”
“그랬어요?”
나는 정말 그랬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 입에서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럼. 진이 씨가 이나 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눈빛이?”
“알잖아. 눈빛이...”
“눈빛이?”
“에이 못해먹겠다!!! 호호호홋!”
“에이 말해 줘요.”
“하여튼 어제 아침부터 사람들이 대놓고 수군거릴 정도였으면 말 다 했지. 우리 청년 의원님 이제 장가가겠다구 말이야.”
나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사방 눈치를 보면서 수줍게 미소지었다. 벽에 붙어 있는 장님거미마저도 날 시샘할 것 같았다.
“어쨌든 이나 씨가 이 난리를 부린 덕분에 나도 편한 친구 생길 것 같아. 알고 보니 동네 아주머니들 꽤 생각이 깨어 있던걸. 여자들끼리 가끔 파티도 하고 쇼핑도 하고 영화도 같이 보자면서 말이야. 나, 그동안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
“그래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아무리 사람살이에 진절머리가 났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같은 종끼리 어울리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마리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평생 함께 팀을 이뤄 일했던 목수 일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의 아버지 심정도, 아버지가 말년에 꿈꾸고 실현했던 특별한 우정의 깊이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내 몸이 곧 서울을 향해 가서 그런지 우리의 ‘논카리스마’ 편집장님도 생각났다. 사장은 그를 신뢰했다. 그렇기에 그를 평생지기 편집장으로 곁에 둔 걸 직원들 모두 알고 있는 바였고. 우리들은 적잖은 세월 함께하며 서로를 식구 삼았던 것이다.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사람 사는 곳은 한가지로 돌아가는 법이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구들방 한쪽 면에는 시꺼먼 내 손자국, 땀자국이 마치 훈장처럼 찍혀 있었고, 구들장 하나하나에는 나와 최진이의 손길과 땀이 서려 있었다. 그 구들장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집 안의 구석구석에는 갖가지 추억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숟가락하나 양푼 하나에도, 전기포트나 먼지 낀 책장 속 책 한 장 한 장에도. 이곳에는 아버지가 못 다 들려준 추억까지 구석구석 스며 있었다. 앞으로 이 집에 스며든 의미를 하나하나 재발견해가며 살아갈 기대에 가슴이 뛰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집은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의 흔적까지도 모조리 갖고 있다. 토막 난 이야기들은 이웃들이 살을 보태 줄 것이었다. 실제보다 더 현실감 있는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하는가 보다.
집안을 정리하고 자물쇠를 채웠다. 1224. 올 내 생일에는 온통 새하얗게 변한 이곳을 보금자리로 삼아, 슬며시 지친 몸을 누이는 사슴을 만나볼 수 있기를!
포클레인으로 새로 다져진 길은 그전보다 약간 높았다. 길을 따라 흐르고 있는 시냇물까지 높이 차가 2미터쯤 되는 곳도 있었다. 아직 잔풀이 나 있지 않아서 길은 그냥 자갈이 불규칙하게 섞인 거대한 흙더미처럼 보일 뿐이었다. 일부러 사람이 씨를 뿌리지 않아도 씨앗은 솜털처럼 날리고, 짐승의 털에 달라붙고, 잔잔한 물살을 타고 이곳에 도달할 것이다. 곧 질경이와 토끼풀, 가을 쑥과 갖가지 풀들이 흙속 깊이 내뻗는 뿌리들로 이 땅이 단단히 다져지겠지.
왼쪽 덤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가만히 서서 한참을 눈으로 훑으니 뒤뚱거리는 비둘기 한 마리가 보였다. 이곳은 정말 이웃 천지야! 가을과 겨울을 나는 식물과 동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더라?
한적한 길을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회관 앞 공터에 당도했다. 아침 공기가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종아리에 닿는 이슬방울이 차가웠다. 지난번에 사서 차 트렁크에서 꺼내는 걸 깜박 잊은 박카스 세 상자를 낑낑대며 꺼냈다. 정情의 무게라고 해야 할까? 며칠 전 박카스를 살 때는 이걸 회관에 바쳐야 한다는 게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사 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카스를 마을회관 앞에 차곡차곡 올리고 쪽지 하나를 남겼다.
‘모두 고맙습니다. 가을에 또 뵙겠습니다. -구들방 처자 드림’
자동차에 타고 짐을 정리한 뒤 문득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열흘 만에 처음 본 거울 속 내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마리아 집 욕실에서는 얼굴을 살펴보고 자시고 할 기운이 없었다. 얼굴 살이 조금 빠졌는지 갸름해진 것 같았다. 핏기 하나도 없던 하얀 피부가 휴양지에서 탄 것처럼 건강한 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는 꼭 선글라스를 끼는 버릇이 있어 무심코 선글라스를 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하지만 그동안 산발머리에 땀국에 빠져 고된 노동을 하며 지냈던 산골 생활과 비교해, 선글라스를 낀 내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꽤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버튼을 눌러 평소에는 듣지도 않는 클래식을 틀었다.
지난 열흘 간, 이제 시골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오두막 산골살이를 했던 시간들이 마치 지난 밤 꾼 꿈처럼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뭔가 나를 끄집어 내리는 구석기 시대에서 날아올라 문명세계로 다시 되돌아가는 듯한 이 느낌은 뭐지? 내친 김에 차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사람 만나기 전에 대충 바르곤 했던 빨간 립스틱을 입술에 긋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그 찰나였다. 우리의 장거리 연애가 순탄치만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번개처럼 한줄기 두통을 남기며 머릿속을 가로질러간 것은.
최진이와 나의 세계는 진정 선녀와 나무꾼의 세계처럼 다를까? 시골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며 이상을 좇아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최진이와, 도심 땅에 발붙이고 속세에서 잔돈푼 따지며 살아가야 하는 나. 일단 내가 서울에 올라가면 서울 생활을 하나도 희생하지 않고, 이곳에 가끔 들르기나 하면서 최진이의 속을 갉아먹는 되먹지 않은 존재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아가씨!”
부동산 아주머니가 운전석 유리창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창문을 내리고 인사를 했다.
“이제 가려고요?”
“네. 가을에 또 올 거예요.”
“아 그럼, 집은, 집은 안 내놓는 거예요?”
아,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갈등했다. 애초에 아버지에게 한 불효를 잊으려 정리해서 팔려고 했던 집이었다. 일단 이곳을 떠나면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랴? 하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열하루 동안 일어난, 평생 결코 잊을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우정과 사랑을 얻은 기적 같은 일들이 떠올랐다.
그 집은 이제 아버지만의 집이 아니었다. 나의 집이었고, 최진이의 집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집이었다. 이제 와서 그 집을 판다는 건 추억과 갖가지 인생의 일부분을 팔아 없애는 것과 같았다. 그 집을 사는 사람이 내 소중한 추억을 이어갈 수는 없을 터였다. 추억과 인생은 차차로 공중 분해될 것이었다.
흔들렸던 한순간만큼이나 빠르게 나는 결정했다. 나는 내가 이곳에서 얻은 모든 것들을 잊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어. 좋았던 것이든, 그렇지 못했던 것이든. 앞으로 그걸 간직하고 이어가기가 쉽든, 어렵든.
더딘 몇 초가 흐른 후,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예의바르게 선글라스를 벗고 말했다.
“팔지 않는 집이에요, 그 집은.”
아주머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내가 아주머니에게 보낸 환한 웃음을 되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