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팅 후기

준비한 스몰토크를 하나도 못함, 긴장성 복통 이야기

by 정이나

배가 조금 아팠는데, 집에 돌아오니 저절로 말끔히 나았다. 배가 아팠던 이유는 말 할 것도 없이 오늘 있었던 미팅 때문이다. 미국 파트너 출판사 사장과 미팅이 잡혀 있었는데, 통역을 해 줄 에이전트가 있지만 스몰 토크 정도는 좀 해야 할 것 같고, 또 우리가 잘 이야기해서 얻어 내야 하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그 사장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았다. (에이전트가 몽땅 다 한국말로 옮겨 주지는 않는 것 같아서.)


어제 AI을 닦달해서 몇 가지 스몰 토크를 준비했다. 먼저, 내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을 예상하여서, "나 먼저 왔어. 여기 앉아." "요즘 날씨 춥지? 네가 사는 곳은 어때?" "한국어 공부는 잘 돼 가?" "한국의 겨울 간식은 붕어빵이야." 그밖에도 비즈니스 관련 표현을 조금 익혀 보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이 꼬였다. 미팅이 9시 30분에 있었기 때문에 경기도민인 나는 집에서 7시 50분에 나왔다. '빠른길찾기' 기능에 의하면 9시 15분쯤에 약속 장소에 도착해야 했다. 그래야만 "나 먼저 왔어."를 할 텐데, 나는 약속 장소에 9시 29분에 도착했고, 그들은 먼저 와 있었다!


"요즘 날씨 춥지?" 등등도 하지 못했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미국인 사장은 나에게 "How's it going?" 이라고 물었는데, 나는 왠지 벙쪄서 한 템포 늦게 그냥 "great"이라고만 말했다. "너는?" 이라도 되묻지도 않고. 결국 준비한 멘트는 하나도 못했다. 이럴 수가...


본격 비즈니스 미팅이 시작되어서는 간간이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는데, 긴 말은 못하고 그냥 추임새? 만 넣었다. 그래도 어젯밤의 한시간동안의 AI와의 맹훈련이 그동안 녹슬어 삐걱대던 영어에 기름칠해 줬던 것 같다. 어쨌든간에 지난번보다 훨씬 매끄러운 미팅이었는데, 그때보다 참여 인원이 줄어서 그런 것 같았다. 두 번째 미팅이라 서로 안면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는 듯했고.


나는 열심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한국말로) 말했는데 (우리 대표님도 바로 앞에 계셨으니까), 떨리거나 말이 꼬이기는커녕 미리 생각해 두지도 않았던 말이 술술 나왔다. (역시 모국어가 최고!) 그리고 필요한 내용을 수첩에 적기도 했는데, 놀라웠던 것은, 손이 떨려서 글자를 잘 쓸 수가 없었다. 나는 메모를 그만둬 버렸다.


세상에, 별로 긴장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미팅에 참여했는데 손은 왜 떨렸던 것일까? 아무리 아니라 해도 긴장을 했었나 보다. 십여 분쯤 지나자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수첩에 필요한 내용을 적을 수 있었으니, 아이고 소심쟁이, 내 본연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배가 고픈 거랑 아픈 게 동시에 찾아왔다. 그래서 순한 차돌된장찌개를 먹었다. 수고했고 긴장 풀라며 동료가 사 준 녹차라테도 마셨다. 그래도 역시 배가 계속 살살 아팠고, 그 상태로 일을 했고, 집에 왔고, 집에 와서 저녁 먹고 씻고 쉬었다. 그제야 복통이 거짓말처럼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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