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도 내내 컴퓨터로 작업을 했더니 번아웃이 와 버렸는지, 오늘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라고는 했지만, 청소하고, 공원에 운동다녀오고, 밥하고, 반찬하고 다 하긴 했다. 그런데 컴퓨터만큼은 결코 켜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오늘은 그냥 넋 놓고 있자. 내일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니까.'
그러고 나서 방문 피아노 레슨을 받기 위해 막판 연습을 하고 있는데, 따르릉!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 아들 대학은 정해졌다고? 경영학과? 그래, 그런데 종교 대학이라며? 그, 종교 없는 애가 채플 수업을 어떻게 들으려고 그러냐?"
우리 집은 종교가 없다. 아들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렇지, 별걸 다 걱정하셔. 나는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안심을 시켜 드렸다. 그러고 나니 아빠도 슬슬 본론을 이야기하신다.
"다른 게 아니고, 뭐 좀 물어보려고 그런다. 돈트 알지?"
"돈트가 뭐야?"
"아니 그, 아이 돈 노 할 때 돈트 말이야."
"아."
"요즘 내가 영문타자 연습을 하는데 말야, don 옆에 있는 그 쉼표 같은 거를 어떻게 입력하는 거냐?"
"아, 어퍼스트로피?"
"그래, 그거."
"아, 그거 그냥 습관적으로 쳐서...자판을 보니까 따옴표 키랑 같이 있네. 그거 그냥 누르면 돼."
"아니, 그게 잘 안 되는데. 그게 맞냐?"
나도 갑자기 아리송하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나는 컴퓨터를 켜고 말았다. 컴퓨터 부팅되는 시간을 못 기다려서 그냥 자판에 대고 don't를 쳐 보니 아까 그 키가 맞는 것 같다. 한글프로그램을 켜 놓고 don't를 치니 맞게 입력된다. 그때 다시 전화가 왔다.
"얘야, 이거 맞다 맞다. 고마워~! 딸깍!"
몇 해 전 은퇴하신 아빠는 처음에는 용돈이라도 벌어 본다고 이것저것 알아보시느라 쉬질 못하셨다. 가끔 트럭으로 물건을 운반해 주는 알바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70이 되자 그런 일들도 하기 어렵게 되어, 그때부터는 산을 다니며 운동을 하셨고 국내 여행도 곧잘 하시곤 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되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고, 그 증상이 나은 뒤에는 디스크가 심해져서 오래 걷지 못하시게 되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다른 취미를 찾으셨나 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나이 40되면 인생을 살만큼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50을 향해 가는 이 시점에서 보니,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고 아직 젊다고 느낀다. 어쨌든간에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고, 이왕이면 즐겁게 살고 싶다. 70이 넘은 아빠도 똑같은 생각을 하실 것 같다. 그래서 새로이 영어공부앱을 다운받으셔서 재미있게 영어 공부를 하시는 거다.
얼마전에는 이런 전화를 하셨다.
"얘야, delicious를 어떻게 발음하는 거냐, 델리커스냐, 델리시오스냐"
"그거 인터넷에 치면 발음 나와요."
"아는데, 들어도 모르겠어."
"그거 딜리셔스야."
"오, 그래 딜리셔수, 딜리셔쓰. 좋아. 이거군. 딸깍."
얼마전까지까지만 해도 딸들과 데면데면했던 아빠는 이렇게 스스럼없이 자식에게 전화할 수 있게 되었다. 아바는 젊었을 적에 너무 가부장적?이어서 딸들과 결코 친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아빠가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딸들도 나이를 먹어 철이 들자 평행선이었던 우리의 관계에 어느 정도 타협점이 생겼던 것이다. 이것은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또 우리 딸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렇게 아빠가 손자의 대학 이야기를 내세우며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당신의 궁금한 점을 속시원하시게 해소하시고는 편하게 전화를 끊은 이야기였다. 아뿔싸! 어서 연습해야지! 나는 얼른 오늘은 보지 않으리라 했던 컴퓨터를 꺼 버리고 다시금 피아노 막판 연습에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