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게 살자
이번 여행에선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브런치에 그걸 소재로 글을 써야지 했는데, 오늘 너무 정신없어서 시간을 보내버리고 나니, 별로 흥이 안 난다. 역시 바로바로 써야 하는데, 정말로 짬이 없었다. 그래도 그냥 써야지.
집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양산에서 몇 가지 문화유산을 보면서 부산쪽으로 향하는데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 언제쯤 체크인하느냐는 것인데, 사실 언제쯤이 될지 몰라서 그냥 5시라고 했다. 그러자 5시에 또 전화가 왔다. 아니, 숙소에서 계속 그걸 체크한다는 게 이상했는데, 직접 예약한 남편한테 물어보니, 번화가에 있는 숙소라 주차장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지정된 주차장에 가서 주차하라는 안내가 왔었단다. 이번에 정말 갑자기 여행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겨우 예약한 숙소였다.
"주차장이 없다고? 주차장이 얼마나 먼데?"
"그 근처겠지, 뭐."
그렇게 부산의 꼬불꼬불하고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심한 미로같은 길을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바로, 언덕 꼭대기에 있는 협소한 주차장이었다. 그곳에서 캐리어 및 보따리를 끌고 매고 숙소로 향했는데, 그 거리가 걸어서 10분? 20분?!! 이라고 했다. 세상에나 어찌 이런 일이!! 숙소 앞에 짐을 내리고 나서 주차하러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눈앞에 놓인 백 개 되는 계단을 보면서, 지금은 그나마 내려가는 길이지만 내일은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이 캐리어 속에서 그날 밤 필요없는 것들을 빼고, 최소한의 것들만 챙겼다. 갤탭은 너무 무거워서 가져가기를 포기하고 차에 두었다. 그리고 신나게 계단을 내려와서 보니까 '보수동 책방골목'이 나왔다. 우리 여행 코스에 없었기 때문에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라 그런지 좀 파장 분위기이긴 했는데, 좋은 구경이 되었다. 잠깐 보았지만 정말로 옛날 책들이 많았다.
숙소로 가는 길에 '국제시장'을 통과하게 되었고, 가는 김에 저녁도 먹고 가자 했다. 그렇게 급히 맛집을 검색해서 나온 닭갈비 집! 그런데 후기를 쓰면 음료를 준다고 하니, 그런 거는 또 꼭 해야지 싶었다. 그러려면 영수증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남편이, 그럼 먼저 계산해야겠네, 하면서 뭔가를 건넨다. 나는 그것이 계산서라고 생각했다. 그때 직원이 와서 영수증 하나를 주면서 이거로 먼저 후기를 써 달라고 했다.
나는 열심히 음식 사진을 찍고, 친절함과 맛을 칭찬하는 버튼을 눌렀다. 저장과 알림을 하고서 음료를 받았고, 아이가 닭갈비와 함께 맛있게 마셨다. 볶음밥도 볶아 먹었고. 다 먹은 뒤에 계산을 하려고 하자 남편이 말한다.
"내가 아까 준 카드로 계산해."
"무슨 카드? 나 아까 못 받았는데?"
"아까 리뷰 쓰라고 줬잖아."
"아까 직원이 다른 영수증 줘서 카드 필요없었잖아."
"어쨌든 내가 아까 카드 줬어."
갑자기 난리가 났다. 난 받은 적이 없는 카드를 혹시 어디 떨어뜨렸는지 열심히 바닥을 훑고, 무심코 받아서 어느 가방에 넣었는지 주머니에 넣었는지 여러 번 조사했다. 결국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어서, 다른 카드로 계산하면서 직원에게 혹시 카드가 나오면 알려달라며 연락처를 줬다.
밖에 나와서도 남편은 계속 내게 카드를 건넸고, 내가 카드를 받았다고 확신을 갖고 말했다. 그런 말을 계속 들으니까, 정말로 내가 받은 것 같았다. 사실 내 기억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누가 잃었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어쨌든 카드를 분실했으니 얼른 중지 신청을 하자고 했다. 그때 아이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카드가 차에 있는 것 같아.
아빠가 엄마한테 카드를 주는 걸 본 기억이 없거든.
우리가 마지막으로 언제 그 카드를 썼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내게 카드를 건넸다고 확신에 찼던 남편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리고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래, 아마 차에 있을 거야!"
"그런데 이걸 당장 확인해야지, 안 그러면 불안해. 내가 차에 갔다 올게!"
남편이 나보고 여기 남아서 짐과 함께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결국 우리는 셋 다 짐을 끌고 지고 돌아가기로 했다. 뭔가 미안해진 남편은 가는 길에 꽈배기 도넛을 사 주었다. 그리고 대망의 엄청난 오르막 계단 아래서 나는 짐을 갖고 기다리기로 하고, 아빠와 아들 둘이 올라갔다.
그래서 카드는 차 안에 있었을까?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카드야 분실하면 중지신청을 하면 그만이긴 하나, 그 뒤에 번거로운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귀찮은 일을 면해서 무척 기뻤다. 아들은 장군처럼 돌아왔고, 아빠는 겸손해졌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이상하다. 네비게이션은 폭이 1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골목으로 우릴 이끈다.
'이거 뭐야? 여인숙을 예약한 건가?'
아들이 있기에 차마 말은 못했지만 남편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벌써 자신의 왜곡된 기억에 한 방 먹은 남편은 점점 가슴을 졸였다.
'예약을 잘못했나? 어쩐지 가격이 저렴하더라! 주차장이 없는 곳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뭔가 엄청난 숙소가 나올 것 같아! 큰일났다.'
하고, 남편은 불안해했다.
그래서, 숙소는 어땠을까? 체크인, 체크아웃을 키오스크로 하는 첨단? 호텔이었다! 물론 작은 '호텔'이었지만 방도 쾌적하고 좋았다. 가성비 넘 좋은 숙소였다. 체크인을 키오스크로 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주인아주머니의 친절한 환대도 받았다. 우린 잘 눌러지지 않는 리모컨으로 겨우 튼 드라마를 셋이 오순도순 보면서 즐거운 저녁 한때를 보내며 여행 첫날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