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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Jul 23. 2020

아날로그 시대의 만남과 여행에 대한 단상

교환학생을 갔던 핀란드를 제외하고 나의 첫 해외여행은 언제인가.

부활절 방학을 이용해 떠났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행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가기로 한 것은 한국에서 같이 일하며 알게 된 내 스코틀랜드 친구 Anna의 영향이 컸다. 그녀 덕분에 St. Patrick's Day를 알게 되었는데 마침 부활절 기간과 겹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Anna의 달콤한 제안이었다.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게 된다면 본인의 언니 Emily의 집에서 지내라는 것. 가난한 교환학생이었던 나는 여행경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비행기 표를 끊었다.


2011년, 그 당시엔 아직 스마트폰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고 나도 물론 스마트폰이 없었다. 한국에 있는 Anna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Emily, 그리고 헬싱키에 있는 나는 페이스북 메신저로 얘기를 나누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2011년 3월 Emily가 보낸 페이스북 메신저 내용.


35번이라는 버스 번호와 집 주소, 그리고 Emily의 전화번호를 적은 포스트잇 한 장만 달랑 들고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밤 10시 35분 나는 스코틀랜드 공항에 도착했고, 35번 버스를 타고 11시가 훌쩍 넘은 어두운 시간 버스기사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Caledonian brewery 앞에 내렸다.


3월이었지만 섬나라 영국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아직 모두가 두꺼운 패딩을 입고 다니는 계절이었다. 지금이야 여행을 많이 해서 지도 보기와 길 찾기엔 도사가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길눈도 어두웠고, 도심도 아닌 주택가에 지도가 있을리 만무하지.


'이 어두운데 Emily 집을 어떻게 찾아가지..' 하고 생각하는 찰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Hyunjin??"



그 밤 Emily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동생 친구를, 비행기가 만약 연착했다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 나를 

마중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 만난 Emily를 버스정류장에서 와락 껴안았다.


덕분에 무사히 Emily의 집에 도착했고 날 위해 마련해준 손님방에서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전날 밤에는 어두워서 Caledonian brewery는 보지도 못했었는데 다음날 아침 너무 반가운 마음에 사진도 찍어두었지.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그렇게 약속도 없이 추운 밤 버스정류장에서 날 기다리던 Emily가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반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언제 올지 알고 기다리는 것과 모르고 기다리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상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것과 모르고 있다가 만나는 것은 천지차이니까.



"나 지금 OO까지 왔는데, 너 지금 어디야?"

"나  O분뒤에 도착해, 너는 언제 내려?"

스마트폰 사용으로 우리는 약속을 하더라도 1분마다 상대가 어디인지 알 수 있고, 내가 어디인지 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생 땐 친구랑 집 전화기로만 약속을 정했었다. 하루는 동네 친구랑 학교 앞 문방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친구가 계속 나타나질 않았고, 나는 혹시라도 집에 가는 중에 길이 엇갈릴까 1시간 동안 문방구 앞에서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을 하며 기다렸다. 1시간 뒤에 잠들었었다는 친구가 달려왔고, 

난 그저 친구를 무사히 만났음에 기뻤다.





첫 여행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시작으로 학기가 끝난 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를 한 달 간 여행할 때도 스마트폰 없이 종이 지도를 들고 다니며 여행했다. 지도가 너덜너덜해지고 접히는 부분이 다 찢어질 때까지. 그 덕분에 더 재밌고 예측불가의 스펙터클한 여행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구글 지도가 말까지 하면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줘 길 잃을 염려가 없지만, 그만큼 길을 잃고 새로운 길이나 숨은 맛집을 발견하는 재미, 길을 물어보며 현지인과 대화하는 재미까지 줄어든 것 같다.



이제는 버스가 몇 개 정류장 전에서 몇 분 후에 오는지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예전엔 한 시간에 1대 오는 기장으로 가는 181번 버스를 타기 위해 언제 지나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버스를 버스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저 멀리 버스가 보이기 시작하면 정말 기뻤는데. 이제는 몇 정류장 전인지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 걸 보면 시대가 빠르게 변한 만큼 참을성도 빠르게 없어졌나 보다. 



내 첫 번째 해외여행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모든 게 너무 스마트하고 편리한 지금보다 약간은 불편했지만 

더 많이 느끼고 더 크게 감동했던 그 시절의 만남과 여행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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