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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nie May 09. 2022

네팔 Nepal

카트만두 / 포카라





카트만두로 가는 길


 미얀마 다음 우리의 목적지는 인도였다. 양곤을 떠나는 날, 우리 둘은 비장했다. 여행 난이도 최상급이라는 인도에 간다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싶었다. 양곤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우리 비행 편을 찾을 수가 없다. 혹시나 싶어서 이메일을 뒤져봤더니, 며칠 전에 메일이 와 있다. 양곤 - 캘커타 행비행이 취소되었단다. 비행 편 자체가 캔슬된 경우는 둘 다 처음 겪어봐서 상당히 당황했다. 다시 양곤 시내로 돌아왔다. 급하게 알아본 호스텔에 짐을 풀고 다른 비행 편을 알아보려는데, 조서방이 소리를 지른다. 카메라가 없단다. 비행기 걱정에 정신이 팔려서 택시에 카메라를 두고 내린 것이다. 이건 카메라를 바친 거나 다름없다며 절망하는 조서방. 하지만 2년 여행 중 이제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카메라를 포기하기엔 너무 일렀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을 걸만한 점은, 우리가 공항 택시를 탔다는 것. 분명 공항 카운터에서 기사와 차를 배정하는 걸 내 눈으로 봤었다. 다시 공항으로 돌아갔다. 택시 카운터를 찾았고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 택시 회사가 바로 공항 앞에 있다며 한번 가보란다. 택시회사에 도착했더니 사장이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는다. 


 '카메라 찾으러 왔지? 우리가 보관해 놓고 있었어. 우리 회사가 이렇게 양심적인 회사야. 혹시 방명록을 하나 적어줄 수 있겠니?' 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건 정말 엄청나게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정말 진심으로 너무 고마웠다. 택시 회사 사장 그리고 택시 기사 아저씨와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고는 다시 호스텔로 돌아왔다. 혼이 쏙 빠지는 하루였다. 카메라를 찾고 나니 비행기 캔슬 따위는 별로 큰일이 아닌 듯 느껴졌다. 기분 좋게 호스텔 침대에 누워 다른 비행 편을 검색했다. 여러 가지를 찾아본 결과, 네팔로 먼저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카트만두로 향하게 되었다.





파리지앵 바티스트


 양곤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길. 우선 쿠알라 룸푸르를 경유해야 했다. 대기 시간이 꽤 길어서 쿠알라 룸푸르 공항에서 하룻밤을 노숙하고 아주 피곤한 상태로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출발은 순조로웠다. 우여곡절 끝에 이제 드디어 네팔에 가는구나 싶었다. 카트만두 공항에 착륙하려던 그때, 알림 방송이 나온다. 카트만두에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지금 착륙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카트만두 상공을 몇 번이나 순회하며 바람이 잦아들길 기다렸으나 실패한 비행기는, 근처의 인도 도시로 향했다. 인도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는 꼼짝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승객들을 내려주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대로 4시간을 방치했다. 웅성웅성 대던 사람들도 지쳐갔다. 그때 옆자리 외국인 하나가 승무원들에게 제안을 한다. '이렇게 둘 거면 물이라도 한잔씩 주는 게 도리이지 않나?'라며. 오. 이 외국인 뭐지. 다시 보인다. 결국 물 한잔도 사 먹게 만드는 에어아시아 놈들이 사람들에게 물을 한잔씩 내어 줬다. 덕분에 물이라도 한잔 마셨더니 살 것 같다. 우리가 그 외국인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해 보이자 살짝 웃는다. 이름은 바티스트, 파리에서 온 젊은이였다. 대화를 나눠보니 진중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아주 재미있는 성격의 소유자다. 


'덕분에 물도 한잔 마시고 너무 고마워'


'저기 미국인 커플 보이지? 여자가 루이뷔통 백을 바닥에 내려놓질 않았어. 승무원이 바닥에 내려놓아야 한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더라고. 게다가 이 비행기가 서고 나서는 와인이며 안주들을 사 먹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있잖아. 이건 너무 부당하다 싶었지.'


그러고 그 미국인 커플을 보니 와인을 홀짝이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바티스트 때문에 한바탕 크게 웃었다. 정의감이 넘치는 녀석이구만. 다행히 비행기는 그날 밤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을 땐 비행기의 모두가 박수를 쳤다. 물론 그 미국인 커플만 빼고. 바티스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겠거니 했는데, 나중에 카트만두의 호텔에서 딱 마주쳤다. 같은 숙소를 예약했던 것이다. 그렇게 바티스트와 우리의 인연은 꽤 길어지기 시작했다. 셋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으로 하는 식사를 같이 하고, 장기 여행자들의 고충, 이제껏 다닌 나라 중에 어디가 좋았는지 등등 이런저런 얘기를 꽤 많이 나누게 되었다. 바티스트가 이란을 꼭 가보라며 추천한 덕분에, 우리는 계획에 없던 이란도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녀석은 일본어에 능통했고, 초섹시한 [바티스트의 표현] 일본인 여자 친구도 있었다. 정말 유쾌한 녀석이었다. 포카라에서는 네팔 막걸리 창을 잔뜩 마시고 세일러문 흉내를 내는데, 거기 있던 모두가 다 자지러졌다.


 네팔에서 바티스트와 헤어지고,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를 여행한 후 파리에 도착했을 때 바티스트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행만 한 거야?' 하면서 웃는 녀석. 카트만두에 가는 길은 험난했지만, 파리지앵 친구를 하나 얻었다.





카트만두의 컬러


 카트만두 시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오토바이, 매연, 소음이 범벅된 거리를 걷다 보면 머리가 아파왔다. 비둘기는 날아다니고, 시장엔 소와 닭들이 돌아다녔다. 개구쟁이 아이들은 온 거리를 헤집고 다니고 머리가 아파진 할머니들에게 한 번씩 혼이 나곤 했다. 하지만 이 정신없음은 인도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인도에 가기 전 예행연습으로 네팔은 겪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혼돈의 카오스에 대한 예행연습이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 카트만두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바로 카트만두의 색깔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원 앞에는 빨간색 사리를 입은 아주머니가 사원에 바치는 샛노란 꽃을 팔고, 시장 가판대의 할머니는 핑크색 사리를 입고 앉아 싱싱한 초록 야채를 팔았다. 인력거꾼 할아버지는 노란 티셔츠를 입고 지나다니고, 비둘기 모이를 파는 아주머니는 큼직한 꽃무늬 바지에 핑크색 두건을 썼다. 어쩌면 아주 칙칙했을 오래된 도시가 비비드 한 원색의 향연으로 한층 밝아 보였다. 나도 쨍한 원색의 사리를 하나 사고 싶었는데 평소 무채색을 즐겨 입는 나에게는 엄청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사리를 들었다 놨다만 몇 번 하고는 결국 사지 못했다. 핫핑크 사리 한번 입어보는 건데... 다음엔 꼭 한벌 뽑아보리라.





스와얌부나트, 몽키 템플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카트만두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위치한 사원이었다. 원숭이가 많아 스와얌부나트보다는 몽키 템플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우리가 네팔을 여행한 때는 2018년이었지만 2015년 지진에 대한 복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어디든 보수 중이었으며, 난민들의 거대한 텐트촌을 지나치기도 했다. 스와얌부나트도 곳곳이 수리 중이긴 했지만 중앙 스투파는 굳건했고, 부처님의 눈은 카트만두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빼곡한 대도시에 지진이 났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지진 전과 같이 사람들은 마니차를 돌리며 기도했다. 우리도 사람들을 따라 마니차를 돌리며 스투파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카트만두에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박타푸르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중세도시다. 15~18세기 카트만두 계곡에서 네팔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말라 왕국의 3대 고도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 중에서도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는 도시. 지진 피해도 비교적 적게 입은 곳이라고 해서 가기 전부터 조금 기대가 되었다.

 박타푸르 도시 입장료를 지불하고, 아치문을 들어서는 순간. 타임리프를 한 기분이다. 정말 네팔 중세도시 한가운데 떨어진 기분. 지진으로 인해 벽들을 나무 기둥으로 고정해 놓은 건 안타까웠지만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잡초가 자라날 정도로 오래된 벽과 지붕, 세월을 가늠하기 힘든 오래된 나무 창틀과 문들. 도자기 광장에는 아직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고, 공방에선 장인들이 만다라를 그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작은 골목엔 기념품 가게와 커드 가게, 게스트 하우스가 줄지어 있었다. 주민들도 관광객들도 꽤 많았지만 이상하게 박타푸르는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타우마디 광장에 있는 레스토랑 2층에서 사원을 배경으로 탈리를 먹고 있자니 네팔 왕족이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광장에선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연인들은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언젠간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가이드에게 박타푸르에 대한 이야기도 잘 들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가야 하는데, 박타푸르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 조서방이 아까 그 커드 집 위치를 꼭 알아두고 싶단다. 커드가 맛있긴 했지. 갑자기 뒤돌아 뛰어가는 조서방. 나는 뒤에서 천천히 쫓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조서방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평화롭던 골목들이 공포가 되어 나를 덮쳤다. 내 수중엔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폰도, 지갑도 모두 조서방에게 있었다. 길을 잃는다는 게 이렇게 한순간이구나 싶어서 아찔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골목을 헤매다 도자기 광장을 만났다. 더 이상 돌아다닐 힘도 없었다. 도자기 광장에 앉아있으면 왠지 조서방이 찾아올 것 같아 한참을 앉아 기다렸다. 만약 조서방이 나를 못 찾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도 잠깐 했으나,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저기서 발갛게 상기된 조서방이 뛰어온다. 대체 어디 갔었냐며. 나야말로 황당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어떡해야 하냐고 했더니 자기가 그 자리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냔다. 잠깐 다녀오겠다고. 그런데 난 정말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이걸로 얼마나 싸웠는지. 그래 네팔에서 실종자 안된 게 어디야. 그래도 이 냥반아. 마누라 좀 챙겨달라고.





파슈파티나트


 파슈파티나트는 네팔 힌두교 최고의 성지로 477년에 세워진 역사가 깊은 사원이다. 메인 템플은 힌두교 신자만 들어갈 수 있어서 우리는 볼 수 없었지만 사원보다 화장터와 가트가 더 인상적이었다. 네팔의 많은 힌두교인들이 여기에 와서 화장을 하고 장례를 치른다고 했다. 파슈파티나트에 흐르는 바그마티강이 바로 갠지스강의 상류이기 때문. 가이드가 말하길 머리를 한 줌만 남기고 밀어버린 사람들이 상주라고 했다. 망자의 기일이나 장례 중인 가족들이 가트에 가득했다. 한편에선 화장이 진행 중이었고, 한편에선 시체를 씻기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보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러게 열심히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는데, 우리 바로 건너편 심하게 오열하는 가족들이 보였다. 망자는 어린아이였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작은 아이. 가족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파슈파티나트를 다녀온 날, 조서방에게 말했다. 세계여행을 나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적어도 눈감을 때 내가 세계일주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하는 후회의 말은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포카라


포카라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위한 관문으로 유명한 도시. 카트만두에서 7시간을 달려 도착한 포카라는 버스터미널부터 압도적이었다. 히말라야 설산이 보이는 버스터미널이라니. 첫인상부터 아주 마음에 쏙 든다. 포카라.





할머니 할아버지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


 카트만두에서도 포카라에서도 한국 식당을 꽤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우리도 오랜만에 한식이 그리워 네팔에서는 한식당을 꽤 자주 찾았다. 한식당에 가면 한국 등산동호회에서 단체로 트레킹을 온 어르신들을 많이 만날 수가 있었다. 역시 등산의 민족. 덕분에 장기 여행자인 우리까지 한식당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어서 감사했다. 포카라에 도착한 첫날도, 삼겹살이 유명하다는 한식당으로 달려갔다. 몇 개월 만에 먹는 삼겹살인지.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어쩌다 보니 옆 테이블 커플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부부도 세계일주 중이란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오늘의 삼겹살이 포카라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고, 우리는 포카라에서의 첫 만찬이라고 했더니. 막 웃으신다. 시간이 더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그런데 본인들이 묵었던 숙소를 추천해준다. 안 그래도 포카라에서의 숙소는 첫날만 잡아두었고 발품을 팔아 알아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추천한 숙소는 아주 친절한 네팔리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운영하시는 작은 게스트 하우스였다. 3층짜리 땅콩주택이었는데, 1층은 할아버지가 여행사를 운영하시고, 2층이 게스트 하우스, 3층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주 자랑하시던 옥상이 있었다. 페와 호수가 보인다며. 옥상에 오르면 정말 페와 호수가 보였다. 방은 정말 작았지만 그만큼 놀랍도록 저렴했고, 할머니의 깔끔한 관리로 침대 시트에선 잘 마른빨래 냄새가 풍겼다. 그렇게 이 건물은 일주일 동안 포카라에서의 우리 집이 되어주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할머니가 옥상에 빨래를 널고 계셨다.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어주시는데, 할머니가 젊었을 땐 정말 예뻤겠구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날엔 스치듯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봤는데, 할머니는 정말 페넬로페 크루즈 같은 미인이셨다. 포카라를 생각하면 이 작은 땅콩 주택과 활짝 웃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이 많이 생각난다. 여전히 건강하시기를.





마차푸차레

 

 미얀마 껄러 트레킹의 강렬한 인상으로 나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봤던 조서방, 수긍해준다. 돌이켜보면 참 고맙다. 본인은 트레킹을 하고 싶었을 텐데, 마누라의 의견을 존중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포카라에서의 우리 일상은 휴식, 휴식 또 휴식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페와 호수 주변을 산책하다 카페에서 블로그를 좀 쓰고, 밤이 되면 마음 맞는 여행객들과 물담배에 맥주를 홀짝였다. 그게 다였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어느 날엔가는 아침잠이 많은 나를 두고 조서방 혼자 일출을 보겠다며 이른 아침 페와호수로 나섰다. 자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다시 돌아온 조서방이 소리를 지른다. 지금 마차푸차레가 보여!라고. 우리가 볼 땐 항상 안개에 둘러 싸여 있던 마차푸차레가 이른 아침에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아무래도 해가 뜨면 기온이 오르면서 온도차로 인해 안개가 생겼었나 보다. 선명한 마차푸차레는 장관이었다.

 히말라야의 유일한 미등정 산, 마차푸차레. 신성한 산이기 때문에 네팔 정부가 등반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더 신비롭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역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마차푸차레를 보는 건가. 고마워 여보.





패러글라이딩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러 다닐 때였다. 카트만두의 눈에 띄는 여행사에 들어가서 비행기나 버스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작은 골목의 여행사가 눈에 띄었다. 사장인듯한 아저씨가 친절하게 맞아준다. 설명도 친절하게 잘해주고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 신뢰가 갔다. 그렇게 포카라행 버스를 예약했더니 아저씨가 묻는다. '포카라는 패러글라이딩이 유명해. 내가 패러글라이딩도 예약해 주는데 할래?' 한다. 가격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알아본 시세보다 훨씬 쌌던 것.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카트만두 여행사에서 포카라로 가는 버스 편과 포카라에서의 패러글라이딩을 다 예약했다.

 그렇게 하게 된 포카라에서의 패러글라이딩. 비포장길을 올라갈 때부터 스릴이 넘쳤다. 차가 뒤집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심한 비포장 도로를 달려 페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도착했다. 패러글라이딩이 아니라도 내려다보는 경치가 이미 기가 막혔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절벽을 향해 뛰어내려야 한다. 예전에 스위스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할 때도 느꼈지만 내가 생각하는 패러글라이딩의 묘미 중 하나는 출발할 때이다. 절벽을 향해 달리다 보면 어느새 공중에서 발길질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허공을 달리는 그 기분. 그렇게 하늘을 날고 있을 땐 주변의 풍경이 오롯이 다 눈에 들어온다. 포카라가 왜 패러글라이딩이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히말라야 설산, 페와 호수, 수많은 글라이더들이 함께 나는 풍경은 포카라가 아니면 안 되는 게 맞았다. 그러니까 포카라는 패러글라이딩!





페와호수


 머무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산책한 페와 호수. 매일 가도 매일 다른 풍경이 매력적이었다. 호수변의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만히 앉아 페와 호수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빨리 흘렀다. 쨍했다가 소나기를 뿌리고, 어느 날은 큰 뭉게구름이 핀다. 아빠는 엄마와 아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동네 아이들은 장난칠 거리를 찾아다닌다. 낚시하는 사람들, 바라히 사원으로 오가는 보트들. 인도를 건너는 오리 떼와 묶여있는 소들. 하나하나 너무 예쁜 장면들이었다. 





코로나 끝나면 어디로 갈까?
'힐링' 네팔


카트만두 시장에서 사리 사서 입어보기. 

맨손으로 탈리 먹어보기.

네팔의 중세도시로 시간여행, 박타푸르 돌아보기. [커드 사 먹는 것도 잊지 말기]

파슈파티나트의 가트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기.

안나푸르나 트레킹 하기.

포카라에서 패러글라이딩 그리고 유유자적하기.

포카라 소비따네 아줌마네에서 네팔 막걸리 창과 감자전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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