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편애한다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어교육자 대회라는 곳에 참석했다. 상도 받았다. 신라호텔에서 며칠 머물렀다. 시상식은 사실 부담스러웠다. 알고 보면 나는 내항인이라.
유튜브 생중계로 보던 가족들과 친구들이 인물 좋게 잘 나온다고 캡처해서 보내준 것들이 우리 학당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에도 들어갔다. 관심과 칭찬을 받으면서 일단 나는 기뻤다. 작년 한 해 동안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궁극의 행복을 느끼면서 일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현재의 일이 참 즐겁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도 적성에 딱 맞고, 소속감을 갖고 같은 분야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동료라는 이름으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좋다. 학생들은 물론, 당연히 좋다. 내가 타고났다는, 우리 할머니 말을 빌려, 나는 확실히 인복이 많다고 주장하겠다.
인터뷰도 했다. 잘한 일은 잘한 거니 세상에 알리고 자화자찬도 어느 정도 하는 게 맞기는 할 텐데, 그러면서도 뭔가 불편한 마음이다.
실은 나는 변한 게 없다. 세월이 흘러서 어느 정도 생각의 흐름이라는 것도 변화를 타기 마련이기에 꽤 긍정적 이어진 내가 되기는 하였는데, 그게 나를 바꾸지는 않는다. 나, 내 안의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는 같다. 다만, 과일이 익듯이 조금 더 영글어진 부분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자두가 자두고, 바나나가 바나나듯, 나는 나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상황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수상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전에는 단점이었던 것이 장점이 되기도, 흠이었던 것이 매력이 되기도 한다는 게, 마냥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서글펐다. 성과가 나를 변화시키듯 보이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다. 다양한 기회가 찾아오는 지금도 나는 동일한 나인데도 불구하고 나 혼자 살지 않는 세상에서 성과는 어쩌면 필요한 요소일 테고, 본질과 더불어 긴장하며 공존하는 지도 모르다.
있는 그대로의 씨앗을, 본질을 알아채주는 사람을 살면서 얼마나 만나 보는가? 무조건적인 애정을 주는 가족도 기대가 섞이기 마련이며 사회는 더더욱 '일로 만난 사이'에 '일'이 우선시 되지 '사람인 너와 나'가 우선시 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무엇을 잘 해내 어떠한 성과를 내서, 칭송하거나 편애하는 일,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일을 하는 세상이, 단지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라 너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장엄하고 광활한 세상은 무한하고 대단하다. 그리고 그 대단한 세상은 동시에 내가 없으면 사라진다. 이 세상 혹은 그 세상, 혹은 내 세상, 같을 수도 또 다를 수도 있는, 내 눈으로 보는 세상은 나의 시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는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에서 오지 않고 나에게서만 온다. 그래서 나는 나를 편애한다. 어떠한 행동과 결과에 의해 정도가 달라지는 관심과 사랑이 아닌 순도 높은 진득한 애정을 나는 내게 오래도록 주어야 한다. 그러려고 한다.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좋다.
예전보다 덜 애쓰는 듯 보이나, 실은 엄청난 공을 들이는 것인데 의식하지 못하는 그 노력이 쉽게 성과로 드러난다. 위의 사례가 대표적일 뿐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간의 시간들이 하나둘씩 결실을 맺는 지금도 의문을 품고 개똥철학을 펼치는 운명을 타고난 나는 여전히 이렇고 저런 새롭고 오래된 질문들을 던진다.
얼마 전 러닝머신을 뛰면서, 정세랑 작가가 출연한 최성운의 사고실험을 들었다. 대화 중에 와닿았던 "우리는 고립되기 쉽다."라는 말을 곱씹는다. 고립을, 나는 종종 외로움으로 확대 해석한다. 나도 절절히 겪어봤고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외로움에 괴로웠기에 누군가의 외로움을 앞서 지레 짐작하고 걱정해 마음을 쓰곤 한다. 인간은 평등하기에 누구에게나 마땅히 동일한 양과 질의 다정함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할 테지만, 쉽지 않다. 편견 없이 누구든 동일하게 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나조차,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호와 불호로 상대를 판가름하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내가 과연 비도덕적인가? 남을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날뛰는 거만한 사람 (종종 피해를 남에게 고스란히 안기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 무지를 폭력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등을, 내가 의도적으로 곁을 주지 않는 이들로 분류되는 이들이 비도덕적인가? 이러한 이분법에 대해서는 아래 덧붙이겠다. 다만 이 맥락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치판단과 도덕적 이분법의 늪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는 순간이 내게는 현재의 일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업을, 수업이 이뤄지는 강의실을, 수업을 하는 나의 정체성을 선생으로 정의하는 순간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호와 불호의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할 수 있다. 욕망을 쫓을 때 우리는 평온해지지 않던가. 내 평화와 위로는 지금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