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

by 보니


한국은 추석이란다.

작년 이맘때 엄마와 여동생이 나를 보러 룩셈부르크에 왔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를 생각하면 늘 복잡한 감정이 든다. 내가 이곳에서 살고 있음을 가장 또렷하게 느끼는 순간은 사우나에 있을 때다. 한국에서도 자주 갔던 사우나이지만, 이곳의 사우나는 전혀 다르다. 매번 들어갈 때마다 내가 내 나라가 아닌 곳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유럽의 사우나, 내게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이 되었다. 요즘 나는 몸이 피로하거나 생각이 복잡할 때면 사우나를 간다. 안 가본 사우나를 찾아 새롭게 도전하는 재미가 있다.



한 번은 집 근처 시립 사우나에 갔다. 평일 낮이라 조용했다. 남녀 mix 시간이었는데 사우나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곳을 몇몇 어르신은 수영 강습을 받고 있었다. 혼자라서 편했다. 룩셈은 독일 문화권이라 그런지 남녀 혼욕 사우나가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알몸으로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몸을 마주한다. 처음엔 많이 낯설었으나 지금은 나아졌다. 나이와 성별이 섞인 수많은 몸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구분이 사라진다. 안경을 벗은 시야에는 희미한 형체만 남고, 그것은 그저 ‘사람의 몸’일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아무 몸도 없고 내 몸만 있으니 그 해방감이 고요에 풍미를 더해주는 게 마음에 들어, 다음에도 또 이 시간에 와야지, 생각했다.


조도가 낮은 불빛과 나무에서 퍼져 나오는 아로마향들. 휴식이다.


안경을 벗은 채로, 거의 보이지 않는 시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가 휴게실을 찾아 스윙 베드 같은 의자에 누웠다. 휴대폰 반입이 금지되어 있고 전파도 닿지 않는 사우나 안에서 강제로 디지털 디톡스를 하자니 별별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다 그때 문득 엄마와 여동생이 떠올랐다. 그때 나를 보러 룩셈에 왔을 때,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뒤늦은 아쉬움이 불쾌함으로 바뀌었고, 그 불쾌함은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되곤 하지만, 그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한국어 수업 시간에 사우나와 찜질방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외국인 학생들에게 내가 아는 한국 문화를 나의 말로 설명해 주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이때의 나는 지킬이다. 그리고 곧 하이드가 된다. 수업이 끝나면,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랑하는 동반자가 곁에 있지만,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전히 비행기를 타야만 닿을 거리다. 이 사실은 어디까지나 나에게만큼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공허함이 열정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나는 내 일이 좋다.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 다만 외국에서 살면서 모국어를 가르치는 것, 멋지고 좋은 일이지만 꼭 그렇게 대단하지만도 않다. 그렇다고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게 나를 살아있게 하면서 동시에 미치게 한다.


그 이후에도 몇 번, 그리고 요즘도 자주 사우나를 간다. 익숙해진 자신감 덕에 출장 중 묵은 호텔의 사우나를 찾기도 했다. 일말의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는 듯이. 당시 내 또래의 여자는 나뿐이었지만 특별히 불편하지 않았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소원이 있다면, 언젠가 캠핑카를 빌려 엄마와 아빠, 가족들을 태우고 독일과 스위스를 거쳐 산속을 달리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그리고 같이 사우나를 하러 다니면 좋겠다고 그리고 언젠가 핀란드에서도 똑같은 일을 해보고 싶다고.


얼마 후에는 남자친구와 룩셈부르크 시내에서 멀지 않은 대형 사우나 센터에 갔다. 야외에 사우나가 여섯 개 이상 있는 참으로 넓은 곳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깨끗했다. 너무도 많은 벗은 몸들을 봤다. 사우나 안에서는 익숙해진 그 몸들을, 사우나 밖에서도, 또 자쿠지로 불리는 탕 안에서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담과 하와가 이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낳았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섹슈얼리티가 제거된 이 상황이 주는 해방감이 분명히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되는 곳, 나는 좋지만 과연 그때 엄마와 동생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문득 주저하게 되자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엄마와 동생은 이런 곳에는 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휴식이 좋고 낯선 경험이 주는 도파민이 있을지라도,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도 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



혼자만의 추측은 그만두고 가족들한테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아마 지금은 잘 거다. 나도 오늘은 일을 쉬기로 했다. 원래 쉬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일단 쉬고 내일 묻겠다. 사우나에 갈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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