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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Jan 21. 2020

애정을 욕심내는 이기적인 관계에 대하여

관계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언니, 저 고민이 생겼어요.”


친한 동생이 개인적인 고민이 생겼다며 고민상담을 요청했다. 오래 만난 연인과의 권태기로 고민하던 찰나에 소개팅 제의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평소 ‘청춘은 좀 더 낭만적일 필요가 있어!’라며 감정에 충실할 것을 외치는 언니에게 뭔가 정해진 대답을 듣고 싶었을 것 같았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 너의 양심, 아니면 새로운 모험”


동생은 ‘가보지 않은 길이라 좀 이상하긴 하네요’라며 새로운 모험을 선택해보겠다고 했다.

연인관계란 신뢰를 밑바탕으로 하는 주장에 있어서 이 대화는 참으로 공분을 살 일이다.




예전부터 연애를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긴 휴식기 없이 연애를 지속해오는 나를 보는 주변인들은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말이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건 좋아하지만 어느 하나의 강력한 관계에 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스러운 눈빛은 받고 싶으면서 관계에 책임은 지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모양새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열다 보면 어느새 피할 수도 없이 우리는 연인관계가 되어 있었다.



 늘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쌍둥이라 어릴 때부터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과 관심을 쪼개어 받고 있다고 느꼈던 탓인지 더 많이 사랑받고 예쁨 받기를 늘 원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고 마치 연간 미션처럼 그들을 나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누군가가 마음을 다해 잘해주는데 그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재밌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동안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어느 순간 세상에 나를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누군가가 언제라도 나를 미워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던 경험이 스무 살 때였으니 그전까지 얼마나 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대학교에 입학 후 처음 친해진 룸메이트는 1학기를 마치던 날 나에게 등을 돌렸다. 나중에 건너 들은 사실은 내가 늘 친구인 자신의 입장보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라고 했다.


그 당시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등을 돌려버렸다는 사실만으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은 간단하다. 욕심이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고 모두에게 사랑받으려는 욕심.




친구관계를 예로 들었지만 이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고 나도 그들이 좋았다. 누군가는 나에게 여름의 풀냄새가 난다고 했고 소울메이트 같다고 했다. 너 말고는 영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했고 사귀지 않아도 늘 옆에 있겠노라 약속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건 친구 이상의 감정을 공유하고 관계를 맺고 싶다는 유혹이고 표현임을 알았음에도 모른 척 이리저리 잘 피해 다녔다. 사랑받고 예쁨 받고 싶었지만 어딘가에 묶이고 싶지 않았고 서로의 옆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서로 계속 궁금해했으면 했고 해야 할 말을 당연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은 사이로 남고 싶었다.





나에게서 여름밤의 풀냄새가 난다는 사람과는 몇 달간 다가오고 도망가는 실랑이 끝에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웃음기 머금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로를 궁금해하는 관계는 더 이상 없었다.

애초부터 서로가 원하는 관계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차라리 멀어진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이기적이게 왠지 모를 섭섭함과 아쉬움도 들었다. 그와 자연스럽게 멀어지면서 한 때 많은 이야기들을 공유했던 소중한 관계는 점점 옅어져 버렸다.


발전이 없는, 앞으로도 없을 관계는 좋은 쪽으로 풀리기에는 점점 어려운 방향으로 꼬여간다. 결국 그 상태로 방치되면 매듭이 느슨해지고 말 것이다. 애초부터 다른 방향으로 풀어나갈 의지가 없다면 지속될 수 없음을 예상했었고 나에게 영감과 애정을 주기만 하는 관계로 두고 싶은 마음은 다분히 이기적인 것이었다.



동생의 고민상담에서 시작된 생각으로, 그해 여름부터 이어져 온 그와의 대화들을 훑어보았다. 다시 보니 서로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관계의 목적이 다름이 더 선명히 보였다.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고 유치했지만 그래도 그땐 즐거웠을것이다.

‘깊게 꼬인 관계치고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의 일기장에는 그렇게 쓰여있다. 그때는 꽤나 멀어진 관계에 대한 여파가 오래갔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상대방은 나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지지부진한 관계를 이어오던 것에 완벽히 질려버린 탓이겠지.




나이를 먹어가는 지금에도 좀처럼 건강하고 단단한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렵다. 특히나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과는 더더욱 어렵다. 많은 걸 욕심내다가 결국 가장 좋지 않은 결과를 얻고야 마니까.


그래서 새로운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는 늘 신중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의 욕심이 남아있는 것 같다.



올해에는 또 어떤 바람이 불었다가 사라질까. 조금 겁이 나는 날이다.





맛있는 술, 일상의 기록, 건강한 생활, 그리고 여름밤을 좋아합니다. 부지런히 일을 꾸미고 몸을 움직이며 살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신 후 공감과 댓글은 작가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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