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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Mar 04. 2020

누구에게나 영화같은 순간은 있었다

ep.5 SKY_영원


안녕하세요, 읽고 쓰는 라디오 수플레의 다섯 번째 순서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편에 등장한 로맨스 이야기를 읽고 core 작가님께서 '다른 작가님들의 로맨스 이야기도 언젠가 들어보고 싶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내 로맨스를 꺼내볼 노래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 문득 떠올라 먹먹해진 노래가 있어 조심스럽게 꺼내보려 합니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그 다섯 번째 곡으로 가져온 '영원'은 배우 겸 가수인 최진영이 얼굴 없는 가수 컨셉으로 데뷔한 그룹 'SKY'의 1집 타이틀 곡입니다. 잔잔한 전주가 나오다 갑자기 일렉기타 소리와 함께 요란한 랩이 지나가고 다시 보컬의 노래가 이어지는데 처음 들었을 땐 전후 반부의 하모니가 어색하더라고요.


저의 첫 감상처럼 역시나 초반의 랩이 없었다면 더 좋은 노래가 되었을 거라고 현재에도 평가되고 있는 곡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멜로디가 많은 팬들의 감성을 어루만지며 당시 음악차트 고공행진을 했습니다.


기다릴게 나 언제라도

저 하늘이 날 부를 때

한없이 사랑했던 추억만은 가져갈게

우리 다시 널 만난다면

유혹뿐인 이 세상에

나 처음 태어나서 몰랐다고 말을 할게

나 약속해




세상에서 오직 둘 만이 기억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친구, 또는 그 외의 다른 사람이라도 오직 그 사람만 떠오르게 만드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딘가에 꺼내 놓으면 빛바랠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도 못하는 그런 노래 말이죠.








여자는 얼굴이 동그랗고 하얀 단발머리 간호사였다. 이제 갓 실습을 시작한 20대의 신입간호사였지만 손끝이 야무지고 누구에게나 친절해 병원의 많은 환자들이 그녀를 좋아하고 찾았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저마다 며느리 삼고 싶다며 선자리를 주선하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한 남자가 그 병원에 응급환자로 들어왔다. 당시 험하기로 유명한 항구도시의 어두운 세계에 휘말려 싸우다 칼을 심하게 맞았다고 했다. 몇 차례의 응급 수술이 이어졌고 위험한 고비를 넘겼지만 완전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남자의 긴긴 입원생활이 시작되었지만 그를 면회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까맣고 비쩍 마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그가 신입간호사는 왠지 마음이 쓰여 매일 아침 병실을 돌 때마다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상처는 고통스럽고 상황은 답답했지만 매일 아침 안부를 물어주는 그녀를 보는 것은 분명 큰 즐거움이었다.


고마움은 관심이 되고 그는 조금씩 마음을 내비쳤지만 여자는 딱 부러지게 선을 그었다. 그녀는 그를 환자 이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아침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둘은 친한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어느새 그는 그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병실에 찾아온 여자에게 그는 말했다. "언젠가 제가 다 낫거든 두 발로 걸어서 저 건너편 빵집에서 밀크셰이크 한 잔 사드리고 싶습니다."

오랜 병실 생활이 마침내 끝나고 퇴원하던 날 그는 정말로 두 다리로 길을 건너 빵집에서 밀크셰이크를 사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녀에게는 한 통의 편지가 왔었다. 잘 지내고 있냐고, 자신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는데."라며 엄마가 대학교 신입생 시절의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였습니다. 엄마에게는 아빠밖에 없다는 사실이 당연할 것 같던 시절에 엄마 마음속에 남아 있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약간의 충격과 함께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를 떠올리면 항상 마음이 아프고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어떤 감정인지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아저씨를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남자의 이름, 살았던 지역, 남자의 편지에 적혀 있던 아들 이름 이 세 가지 단서뿐이었지만 그 당시 유행했던 '싸이월드'를 이용해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이름과 추측한 나이로 몇 시간을 성과 없는 검색을 하다 문득 부모님의 이름으로 아이디를 만들어 활동하던 친구들이 생각나 그 남자의 이름을 검색창에 찾아보았어요. 지역과 이름, 나이가 일치하는 사람을 찾았고 아빠의 이름으로 아이디를 만들어 활동하던 중학생 남자아이를 발견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쪽지를 보냈습니다. '아버지께서 00년도에 00 지역의 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으셨는지 확인해주실 수 있나요?' 그 뒤 엄마는 한참 초조한 듯 서성거리며 답장을 기다렸습니다.



다음 날 학생에게 답장이 왔어요. 놀랍게도 학생의 이름은 편지에 있던 아들의 이름과 일치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아빠도 20년 만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에 놀라워하고 있다 했습니다. 그렇게 연락이 이어졌고 서울에 살고 있는 아저씨를 만나러 몇 달 뒤 엄마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광화문에 엄마를 데리러 좋은 차를 몰고 나온 아저씨의 인상은 좋아 보였고 오랜만에 만나는 두 사람이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저는 반나절 동안 자리를 비켜 주었죠.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만난 친구는 요즘 즐겨 듣는 노래라며 스카이의 '영원'이라는 노래를 들려주었고 그 뒤 엄마는 자주 그 노랠 들었어요. 엄마는 이 노래를 들으면 아저씨의 안타까운 인생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20년 만에 만난 그날 아저씨는 지금 암 투병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고 했어요.

"그냥 찾지 말고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 걸 그랬다.”

엄마는 20년 전 그때처럼 다시 병상에 누운 그를 위해 우리가 사용하던 MP3 플레이어에 스카이의 '영원'을 비롯해 여러 개의 음악을 담아달라고 한 뒤 서울로 보냈습니다.


MP3를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오고 두 달쯤 지났을 무렵 전화를 건 엄마는 그의 아들에게서 그의 임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미 한 달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요.







배우 최진실의 동생인 배우 겸 가수 최진영이 안타까운 선택을 한지도 한 달 후면 10년이 됩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노래를 들으며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며 최진영뿐 아니라 20년 전 병상에 누워 있던 한 남자와 그를 정성을 다해 돌보았던 얼굴이 동그란 간호사를 떠올립니다.

엄마는 그 이후 이 노래는 들으면 마음이 먹먹하다며 잘 듣지 않으십니다. 이제는 그 노래를 들을 때 떠올리는 사람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20년 전 함께 먹었던 밀크셰이크의 맛도 이제는 그녀만이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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