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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Jan 20. 2021

기억의 습작, 딸이 엄마에게

ep. 46 뷰렛_거짓말


수플레 시즌 2가 시작되었습니다. 각자 즐겨 듣는 노래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생각에 문득 다른 사람들의 노래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궁금해졌지요. 그렇게 몇몇 작가님과 함께 매거진을 시작한 게 1년이 지나갔고 올해는 새로운 작가님들과 함께 글을 쓰게 되었어요. 다들 담고 있을 저마다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수요일이 기다려집니다. 수플레의 글을 읽을 때는 꼭 추천곡을 함께 들으시길 권해드립니다. 조금 더 이야기 속 주인공에 몰입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이번 주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추천곡은 '뷰렛'의 ‘거짓말'입니다. 시작과 동시에 울리는 베이스 소리를 들으면 순식간에 2007년으로 타임슬립이 시작됩니다. 저는 어느 칙칙한 흡음실 속에 기타를 잡고 서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29살의 내가 보이지 않는 열여섯의 까무잡잡한 소녀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더듬더듬 코드를 잡아내고 있어요. 입가에는 흥분을 감출 수 없는 미소를 씰룩거리면서요.



https://youtu.be/sRTc79WgXHA

https://www.youtube.com/watch?v=r1PQ4FsogOY

2019 동두천 콘서트에서 반가운 얼굴이



이 노래는 2007년 5월 발매된 '뷰렛'의 1집 앨범 타이틀곡이자, 그해 열여섯의 중학생들이 학교 축제에 오르기 위해 결성했던 초짜 밴드의 공연 후보곡이기도 합니다.


한 달 뒤 열리는 학교 축제 오디션에 덜컥 신청서만 내놓고 무작정 악기를 배워보겠다며 찾아간 곳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였어요. 그곳에서 기타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에게 푹 빠져 학교가 끝나고 학원 가기 전 왕복 두 시간의 거리를 다녀오며 부모님 몰래 한 달을 배웠지요. 그야말로 저급한 실력에 의욕만 앞선 우당탕탕 밴드였지만 2007년 12월 21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장되던 그 무대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무대 아래 연주자보다 더 긴장한 듯 서있던 아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에 시야가 흐려진 채로 두 곡을 완주했지요.


 







엄마가 15년간 다닌 직장을 나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아빠에게 전해 들었을 땐 덜컥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15년이라는 긴 시간에 비하면 고작인 3년 반 다닌 회사를 나올 때에도, 아니 심지어 4년 일하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에도 세상 서럽게 울어대던 내 모습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15년이라니.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엄마가,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회사를 나오는 마음이 오죽 헛헛할까 싶었다.

그날 저녁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걱정했던 것보다 엄마의 목소리는 밝았다. 이제 나이도 있고 너무 오래 일했으니까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면 된다며 걱정 말라던 아빠의 말처럼 엄마의 목소리는 새삼 후련하게 들렸다. 그렇다 해도 엄마는 늘 힘든 티도 잘 안내는 사람이었으니 완벽히 그 마음을 예상할 순 없었다. 그렇게 오래 엄마 딸로 살아왔어도 여전히 딸은 엄마를 잘 모른다.




다음날 아침 엄마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어젯밤 쓸만한 공책이 있나 책꽂이를 뒤적이다 울 공주들의 2007년 추억이 깨알처럼 적혀있는 걸 보게 됐어’라며 함께 보내온 사진에는 2007년 공연을 하던 그 날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지금 읽어보니 별거 아닌 이야기를 참 대서사시처럼 써놨다 싶고 사춘기 시절답게 감성이 지나쳐서 부끄럽기도 한 글.

그날 저녁 엄마에게 또 전화가 왔다.



우리 딸이 어릴 때부터 하도 맨날 자기 것을 잃어버리고 못 챙겨서 매번 혼낸 것 같은데, 어제 그 글을 읽어 보니 이렇게나 생각이 많은 아이라 정작 자기 것은 못 챙겼었던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걸 몰라줬던 게 이제야 마음이 아팠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이렇게 글을 잘 썼는데 그때 더 알아봐 주고 잘하는 쪽으로 밀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그것도 미안하더라...




30년을 가까이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엄마가 딸에게 못해준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늘 완벽한 엄마였으니까. 집안일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남편과 두 딸은 물론 이웃들과 친척들도 잘 챙기고 밖에선 일도 완벽하게 하는 그런 엄마.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도 없고(티브이에서 슬픈 장면이 나올 때는 제외하고) 소리 높여 화를 낸 적도 없었으며 매를 든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 엄마가 잘 밀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조금 서글픈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에서 이야기를 했다. 지하철 소리에 묻혀 선명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히 그런 마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에이... 지금 일 잘하고 있는데 뭐” 민망해서 말을 빙빙 돌리다 끊어 버렸다. 엄마는 완벽한 엄마인데 어쩌고... 그런 말은 하지도 못하고. 그날 밤 엄마는 아빠에게도 같은 말을 하며 시무룩했다고, 다음날 전화 온 아빠가 이야기했다.

평생 해온 일을 내려놓게 되는 날을 앞두고 애써 밝은 내색을 했지만 시원섭섭한 마음에 새벽녘 공책을 찾다 어린 딸의 기록을 발견한 엄마가 무슨 마음이었을지. 어린 딸의 모습에서 그 시절 엄마의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었을지 왜 엄마가 그렇게 긴 생각에 잠겼던 것인지 여전히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딸은 엄마를 잘 모른다.




열일곱의 소녀에게는 일생일대의 큰 ‘도전’이었던 그 무대를 마치고 가슴이 벅차올라 적어 내려간 노트가 십 년이 넘은 지금 서른을 바라보는 자신과 예순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에 예상치 못한 돌멩이를 던졌다. 그 기록이 없었다면 희미하게 형체로만 남아 있었을 기억이 그 노트 하나로 눈 앞까지 다가와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기록에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기록만큼이나 노래에도 강한 힘이 있다.


덕분에 그 노래를 오랜만에 들었다. 우당탕탕 밴드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곡. 이제는 그 노래를 들으면 열여섯의 나뿐 아니라 쉰아홉 엄마의 시무룩한 목소리도 떠오를 것 같은 곡. 그리고 나는 올해 다시 밴드를 시작했다. 오래됐고 지금은 멋없는 노래이지만 다시 한번 연주할 수 있도록.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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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감성의 음악 공유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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