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이 Feb 16. 2021

공기의 냄새

상쾌하고도 고소한 그날의 공기


계절이 바뀔 때는 공기 속에 특유의 냄새가 난다. 특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는

상쾌하고도 고소한 냄새인데, 다른 계절 내내 잊고 살다가 꼭 그때가 되면 그 공기를 느끼곤 했다.


그날도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런 공기 안에 우리 둘이 있었다.

가난한 나는 이사를 자주해야 했고, 그런 나를 그가 도와준 날이었다.

이사가 얼추 마무리된 뒤, 저녁을 먹기 위해 우리는 홍대의 작은 골목 뒤를 오가고 있었다.

작고 가파른 길이었는데, 그날 아마도 처음 그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난 뭐가 그리 신났는지 계단 위를 깡충깡충 뛰어다녔고 그는 나를 따라오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저 멀리 뉘엿뉘엿 지는 해는 하늘의 바탕색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조용한 골목에 오로지 우리 둘만 걷고 있었다.


상쾌하고도 고소한 공기의 냄새를 맡고 있자면 우리는 더없이 행복해졌다.

우리는 젊었고, 계절은 완벽했다. 풍경은 그렇게 우리와 잘 어우러져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계단 옆으로는 작은 집들이 빼곡히 차있었다. 그 사이에 작은 반지하 방에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그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잠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작은 상을 펴고

무기력하고 텅 빈 눈으로 TV를 응시하며 양은냄비에 담긴 김치찌개와 밥 한 공기를 먹고 있었다.

나 역시 반지하에 살고 있었기에 '문을 열어 두면 저렇게 안이 다 보이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지나쳤다.

남의 저녁시간을 염탐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어 금세 그 자리를 떠났지만

이상하게 그 남자의 작고 쓸쓸한 저녁상이 오래도록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많은 일이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 날의 작은 사건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나는 또 혼자가 되었고 일에 파묻혀 하루가 일주일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며 지냈다.

경제적인 상황이 나아져서 해가 드는 집으로 이사를 했고 

무료하지만 무난한 날들이 이어져갔다.

그리고 얼마 전 그곳을 다시 지나쳤다.

밖에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내리는 눈을 보고

조금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그곳까지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곳인지 몰랐는데 문득 그날의 공기의 냄새가 떠올랐다.


상쾌하고 고소한 냄새. 그리고 줄줄이 그날의 기억들, 그 사람의 표정과 소소한 감정까지도.


그 계단 옆, 반지하에 창문은 불이 꺼진 채 굳게 닫혀 있었고 내가 사랑하던 그도 내 옆에는 없었다.

축축한 눈이 조용히 계단을 성실히 덮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늘한 추위는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적막한 어둠은 주변에 눈과 함께 가만히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 위를 무기력하고 텅 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눈물은 나지는 않았다.

꽤나

쓸쓸해 보였다.

눈 위에 혼자인 나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까치,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